대구는 내가 여러번 방문했었던 곳이지만 아직도 가보지 못한 곳에 엄청나게 많은 도시다. 역사적인 일들이 많았던 도시인데 요즘은 그런 역사적인 장소를 모두 복원해서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어 볼거리가 더욱 풍부해졌다고 생각된다. 김광석 거리에서 나와서 3km정도 떨어져 있는 경상감영공원으로 이동했다. 대구광역시청을 중심으로 볼거리가 많이 산재해 있는데 국채보상운동 공원은 가 보았지만 경상감영공원은 처음 방문해 본다.
대구시는 오래전부터 공공기관의 담을 허물어 공원처럼 만들면서 나무를 많이 심어서 요즘은 도시가 많이 푸르러지고 여름철에 온도도 많이 떨어졌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경상감영공원도 담이 없이 공원화 시켜 놓았다. 경상감영공원은 조선 선조 34년(1601년)에 만들어진 경상 감영이 있던 장소다. 한 때 경상북도 청사로 사용하였다가 도청이 다른 장소로 이전 되고 난 뒤 대구시에서 1970년 중앙공원으로 개장했다고 한다. 1997년 도시 미관을 해치는 담장을 허물고 경상감영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경상감영 공원은 원래 경상감영의 일부에 불과하고, 많은 건물이 일제 시대에 훼손되고 축소되었다고 한다. 선화당(宣化堂)은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장소로 1730년 두 차례의 화재를 입었고, 지금의 건물은 순조 7년(1807년)에 재건 되었다고 한다. 현재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 집이다. 선화당 안내판에는 2단으로 된 겹처마가 특징으로, 현존하는 관아 건축이 별로 없어 아주 귀한 가치를 지닌 건물이라고 한다.
경상감영공원의 징청각(澄淸閣) 뒤쪽에는 관찰사와 대구 판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총 29기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의 관찰사가 가지는 권한은 군사, 경제, 법률 등 왕권을 대행하는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물러나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선정비를 세워 주었을 것이다. 탐욕스럽지 않은 관리가 있었다면 다행이지만 안타깝게 그런 관리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 권력이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관찰사의 재임기간을 제한했었다고 들었다. 꼭 대구여서가 아니라 어느 지역을 가던지 너무 많은 선정비가 많아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경상감영공원에서 바로 대구 근대역사관으로 연결된다. 대구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인데 , 건물 모양이 요즘 스타일이 아니다. 근대 역사관 건물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건물이었다. 1954년부터는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2011년부터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된다고 하는데, 식산은행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람을 유도하기 위해서인지 관람료를 받지 않고 있었다.
역사관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방문객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았다. 1층은 상설전시관이고 , 2층은 기획전시, 체험학습, 문화강좌 등이 열린다고 한다. 상설 전시관은 몇 개의 소 주제로 나뉘어져 있는데, 조선식산 은행실, 역사연표실, 근대의 태동, 근대의 문화 등 이외에도 몇 개의 전시관이 있었다. 박물관과는 달리 너무 사진과 함께 너무 많은 글로 표현되어 있어 교육적인 내용음 많지만 지루함이 느껴진다. 왜 관람객이 많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는데, 조금 더 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구에서 이어진 독립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에서도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교과서에서 배워 알고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차관을 국민들이 모금하여 갚자는 운동으로, 1907년 대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이 우리에게 돈을 꿔 준 이유는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는 것이었고, 이를 막자는 것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지만, 우리나라에 IMF 사태가 발생했을 때 전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금모으기 운동의 정신적 본류였다고 생각한다.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가 되기도 했었던 대구 모습도 볼 수 있다.
인력거와 더불어 전화, 시계, 안경, 라디오 등의 근대 유물도 몇 점 전시되어 있으나 숫자가 그다지 많지는 않다.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을 역사관으로 개장하는 과정에서 일부는 일제 시대에 흔적을 모두 없애지 않고 남겨 놓기도 했는데 잘했다고 생각한다. 식산은행도 헐지 않고 이렇게 활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너무나 쉽게 옛 것을 헐어버리거나 없애버리고 새것만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과거는 용서하되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짧은 시간에 대구 근대역사관을 돌아보았는데 어른이 되어서 왔기에 볼만 했다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들의 눈높이가 조금 필요해 보였다.
대구 근대역사관 구경을 마치고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지정된 대구 약령시장을 찾아가 보았다. 조선시대부터 한약재와 약초를 파는 시장으로 한강 이남에서 제일 크게 한약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통시장이다. 약령시장의 명성에 걸맞게 길 양쪽으로 한의원, 한약방 들이 줄지어 있고, 한약거리라는 것을 알려주듯이 한약과 관련된 조형물들도 곳곳에 만들어져 있다. 약재로 사용되는 동식물과 환약 장면들이 형상화되어 있다.
약령문(藥令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약령시한의약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한약재도매시장, 2층은 한방체험실, 3층은 한방역사실로, 3층으로 입장해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관람하게 되어 있었다. 대구에 약령시가 들어선것은 1658년 효종 9년으로 처음에는 경상감영 내에 약령시가 있었다고 한다. 1908년 지금 위치로 약령시가 이전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약령시에서 독립운동 자금의 거점이 된다고 강제 폐쇄되기도 했다고 한다. 대구 근대역사관과는 달리 제대로 된 박물관이란 느낌이 든다. 약령시 옛모습을 만들어 놓은 모형을 비롯해서 어린 아이들과 함께 오면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다고 생각된다.
시기적으로 지금이 여행을 많이 하지 않는 때인지 약령시 한의약박물관에도 관람객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가족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보이질 않아서 결국 셀픝타이머를 이용해서 한장 찍는다. 2층 한방체험실에는 우리 몸과 사상의학, 다양한 체험으로 딱딱하고 어려운 한의약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자신의 현재 건강 상태를 체크해 볼수 있는 공간도 있고직접 퀴즈를 통해 자기가 무슨 체질인지도 알아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요즘 건강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 높은데 한번 방문해 보아도 괜찮은 박물관이었다.
박물관 옆으로 커다란 교회가 있었는데, 대구 경북지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라고 한다. 교회의 시작은 1898년으로 1933년 교회당을 짓고, 제일교회당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붉은 벽돌로 지은 교회 건물이 인상적이다. 곳곳에 이런 볼거리가 숨어 있는 대구다.
대구 약령시장 방문을 끝으로 짧은 대구 여행을 마친다. 대구를 여행하겠다는 생각으로 대구를 방문한 것이 아니라 고향집 방문과 부산에서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린 것이어서 구경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다음번에는 대구를 여행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시 한번 본격적인 대구 문화탐방을 해 보아야겠다. 약령시장에서 보약이라도 한첩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국산한약재를 제대로 사용할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을 보면, 한의사들의 자업자득이 아닐까싶다. 모든 것이 정직과 신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400여년 역사의 약령시와 약전골목 구경을 더하고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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