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대회 참가중 처음으로 늦잠을 자서 대회장에 가보지도 못할 불상사가 생길뻔한 날이였다. 전날 이문희님과 함께 장안동에서 새벽 4시 50분에 만나기로 했었는데 문희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온 시간이 4시 48분, 그 시간에 아직 꿈나라에 있었다. 알람을 맞춰 놓았는데 전날 너무 피곤했는지 알람을 꺼버리고 다시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세수하고 머리감고 면도하고 옷 갈아입는데 5분, 차타고 분당에서 장안동까지 가는데 25분이 걸려 번개불에 콩 볶아먹듯 도합 30분만에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만약 버스를 예약했더라면 꼼짝없이 차를 가지고 혼자서 대회장까지 가거나, 늦잠때문에 대회에 참가하지도 못할 상황이 생길뻔한 것이다. 어디다 정신을 두고 사는 것인지...
나 때문에 함께 가기로 한 일행들이 늦어진 것 같아 표시는 안냈지만 스스로 마음이 많이 조급했다. 중간에 식당에서 주문한 식사까지도 늦게 나와 더욱 마음이 급해져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을 무시하고 안개까지 끼어 있는 철원가는 길을 몇번의 신호위반을 하며 달렸다. 철원에 가까와지니 대회장이 몇 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해 안심이 되었고 결국 대회 출발 1시간 전에는 도착했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운전해 오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도착한 이후 대회장 주변인 고석정과 한탄강을 구경하지도 못하고 대회 준비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서울도 오늘은 기온이 내려간다고 했는데 철원은 서울과는 달리 완벽한 가을날씨이다. 오늘은 원래 여의도에서 어린이 성장마라톤에 아들들과 함께 10Km 구간을 함께 달리려고 했는데 철원대회에서 한국자생식물원 원장인 김창렬님이 풀코스 100번째 완주를 하는 날이어서 아이들은 집사람과 함께 여의도로 보내고 나만 철원대회에 늦게 신청해서 오게 되었다.
날씨도 선선하고 구름도 적당히 있고 출발시간도 다른 대회보다 빠른 8시 30분이어서 뛰는 여건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더구나 이번 철원대회에는 철원출신의 기업가가 성금을 기부해 다른 대회에 비해 상금이 많이 걸려있어 기록에 자신있는 고수들이 엄청 많이 출전했다. 어짜피 고수도 아닌지라 상금에 욕심을 낼 수도 없지만 선선한 날씨로 인해 다른 때보다는 기록을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춘천대회도 이제 한달 반밖에 남지 않았으니 오늘은 3시간 20분을 목표로 달려 보기로 한다.
앞에서 출발하면 초반에 오버할 것 같아 무리의 중간이후에서 천천히 출발했다. 첫 2Km는 몸을 풀어준다는 느낌으로 5분 10초의 페이스로 달렸다. 중후반에서 달리는 주변의 사람들도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것 같다. 고석정에서 출발했는데 출발지를 벗어나자 바로 들판이다. 운전을 하고 올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천천히 달리면서 보니 철원의 들판에는 벌써 벼들이 익어가고 있어 곧 추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움과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곳에서 불과 몇 Km만 북쪽으로 가면 바로 비무장지대이고 북한땅이 접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켠에서 답답함도 함께 느껴진다.
2Km를 지나고나서는 천천히 속도를 올려 주었다. 아직까지는 기온도 올라가지 않아 달리기에는 너무 좋은 날씨이다. 풀코스 대회 참가자가 천명이 넘지 않아서인지 3-4Km를 지나니 앞뒤 간격이 많이 벌어지는 것 같다. 철원을 몇 번 와보기는 했어도 고석정쪽으로는 와보지 않았기에 오늘 달리는 도로도 처음 달리는 길이다. 생각보다는 오르막이 별로 없는 평지에 논밭이 펼쳐져 있어 왜 강원도 땅이면서 철원평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속도를 내서 매 Km당 4분 35초까지 올려도 그다지 힘이 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뒷쪽에서 출발했더니 중반이후 주자들을 많이 추월할 수 있었고 결승점까지 도착하면서 추월한 사람은 꽤 많았는데 나를 추월해간 사람은 4명밖에 없었다. 4Km를 지나면서 최윤성님과 정성근님을 만나서 세사람이 함께 동반주를 했다. 세사람 모두 지난 동아마라톤에서 Sub-3를 했던 사람들이라 함께 뛰니 주력도 비슷한 것 같고, 아주 편안한 달리기가 된다. 오늘은 모두 기록에 대한 욕심이 없는터라 내가 생각하고 있던 3시간 20분 안쪽으로 달려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달리다보니 10Km 근방에서 사진으로 많이 보던 노동당사 건물이 나온다. 사진으로는 엄청 큰 건물인지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는 훨씬 작다. 노동당사를 지나니 바로 민간인 통제선이 나온다. 검문을 하고 있는 군인들이 달리는 주자들의 배번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적고 있다. 나 역시 20여년전에 강원도 양구지역의 민통선 안쪽에서 군생활을 했기에 감회가 새로운데, 철원은 같은 강원도이지만 내가 군생활 했던곳에 비하면 아주 편안한 지역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평지이다.
노동당사를 지나고나니 도로변에 지뢰밭 경고표지판이 설치되어 있고, 군인들도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데 정말 오랫만에 보는 풍경이다. 민간인 통제 구역 안쪽에서의 달리기 인지라 중간 중간 현역군인들이 나와서 경계를 서면서 응원을 하고 있어 심심하지 않게 달리수 있었고, 젊은 그들에게 건강한 40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마 왜 이런 곳까지와서 고생하면 달리는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군대생활에서 행군과 구보가 지겨운 그들일테니..
민통선 진입이후 옛 군생활의 경험으로 아군 초소와 북한땅을 가늠하면서 달리는데 함께 달리는 다른 사람들은 그 느낌이 오지 않는 듯하다. 그져 앞만 보고 달리면서 지루한 직선도로의 지겨움만을 호소한다. 알면 많은 것이 보인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엄청나게 긴 직선도로가 끝날무렵 드디어 하프지점에 도착한다. 하프지점의 도착시간은 1시간 38분. 앞으로 후반부에 속도가 많이 쳐지지만 않는다면 목표를 달성하는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프지점은 바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과 경계점에 접해 있었다. 대회 주최측의 사람들과 자원봉사자, 현역군인이 많이 나와서 큰 박수를 치면서 응원을 하고 있다. 시간을 가지고 온 여행이었다면 철책선도 구경하고 싶고, 관측소에 올라가서 비무장지대와 북한땅도 보고 싶은 마음이지만 오늘은 달리기를 하러 왔으니 뛰는 일에만 열중해야 한다.
시간이 10시가 지나면서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한다. 민통선 안쪽은 군사지역이어서인지 도로가에 가로수가 심어져 있지 않아 나무그늘이 전혀 없는 도로였다. 바람이 등쪽에서 불어 달리기는 편하지만 점점 몸이 더워지기 시작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간 중간 구름이 많이 있어 뛰약볕을 많이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5Km 간격으로 급수대가 잘 운영되고 있고 갈증을 느끼지는 않는다.
하프지점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 많았던 것 같은데 하프이후는 완만한 내리막이 시작된다. 비교적 고도차가 별로 없는 편이어서 날씨만 조금 더 선선할 때 대회가 개최된다면 더 좋은 기록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25Km를 지나면서 달리는 방향이 바뀌니 맞바람이 불어온다. 시원하기는 한데 속도를 내는데에는 문제가 생긴다. 아마 혼자서 뛰었다면 이곳에서 속도가 많이 줄어들었을텐데 3명이서 함께 뛰다보니 서로 의지가 되고 격려가 되어 처음으로 다가온 나약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
길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도 구경하고, 철 이른 벼베기를 하고 있는 들녘의 모습도 보면서 계속 달렸다. 여름에 훈련량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30Km가 넘는 길을 쳐치지 않고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선선해진 날씨와 함께 호홉을 맞추며 달려주는 지인들 덕분이 아닌가 싶었다. 32Km 지점에서 처음으로 반환코스가 있어 앞서간 주자들을 마주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지인 몇사람을 마주칠 수 있었는데 다들 잘 뛰는 사람들인지라 오늘 내가 무척 잘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35Km 지점에서 최윤성님이 조금씩 뒤로 쳐지기 시작한다. 끝까지 함께 갔으면 좋았을텐데 속도가 더 늦어지면 마음먹은 시간내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아 정성근님과 함께 계속 속도를 유지하며 달린다. 결승점까지는 7Km가 남았고 목표 시간까지는 37분이 남아 있다. 날씨가 점점 더워져 아침에 출발할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더운 여름날씨로 바뀌고 구름도 거의 없어 땡볕 아래를 달리게 되었지만 비교적 시간적인 여유는 있는 형편이다.
논과 논 사이로 뚫린 농로도 달리면서 맑은 공기를 흠뻑 취하는데 논 가운데 있는 농로인지라 이곳 또한 가로수가 없어 무척 덥다. 그리고 37Km 지점의 거리표시는 잘못되지 않았나 싶다. 이제 남은 거리가 6Km 밖에 남지 않아 어느정도로 가면 목표달성이 가능한지를 생각하면서 달리는데 가도 가도 표지판이 나타나지 않는다. 순간 내가 보지 못해서 지나쳤는가 생각했는데 거의 7분 가까이 뛰어가니 그때서야 표지판이 나온다. 거리 표지가 잘 되었어 있는 것으로 잘 진행되는 대회인지를 판단하는 나로서는 이번 대회가 거리 표지 이외에 모든 점에서 훌륭하게 진행되었음에도 조금 화가 난다. 그나마 기록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기록에 신경을 썼다면 아마 거리 표지가 잘못되어진 것은 크게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3Km를 남기고는 내가 힘이 들어 정성근님을 먼저 보내드리고 뒤모습을 보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달렸다. 그런데 1.5Km 정도를 남기고는 체력이 많이 떨어져 달려온 속도를 유지하지 못해 많이 쳐져 버렸다. 힘들게 달리면서도 멀리 고석정 랜드의 구조물이 보이기 시작하니 막판 힘이 다시나서 의욕을 북돋아 힘을 냈다. 아마 지난 여름 훈련량의 부족이 막판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남은 기간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결승점 도착시간은 3시간 18분 21초. 후반 하프가 전반보다 3분 늦은 1시간 40분 35초가 걸렸다. 후반에 힘을 내서 이븐 페이스로 달렸으면 더 좋았을텐데 항상 막판에 힘에 부쳐 빌빌거리니 연습부족 이외에 다른 변명이 있을 수 없다. 나중에 기록실에서 내 기록을 확인해보니 총 562명이 완주했는데 그중에서 73등을 했고, 완주자 중에서 31명이 서브 쓰리가 나왔으니 얼마나 고수들이 많이 참가했는지를 알수 있는 대회이다.
대회장에 들어와서 맛사지 서비스도 받은 것가지는 좋았는데, 앞서 들어온 10Km나 하프주자들이 먹거리를 다 먹어버려 막걸리나 다른 먹거리를 구경도 하지 못했다. 풀코스를 뛰면 대부분의 대회에서는 이번트 행사나 먹거리 행사등이 끝나버려 대회장의 파장분위기를 경험하곤 하는데 풀코스 주자들을 위한 배려를 주최측에서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곤한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에서 개최하는 대회는 기대감이 크기에 풀코스 완주자까지 생각하는 세심한 배려가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오늘 철원대회를 평가한다면 달리는 코스도 아름다웠고, 대회 진행도 아주 잘 된 대회로 기억될 것이다. 특히 대회진행 뿐만 아니라 자원봉사자나 군인들의 응원과 봉사에 대해 만족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대회였다고 생각한다.
약갼의 휴식을 취하고 나서 오늘 풀코스 100번을 완주하는 김창렬님을 마중하러 달려온 길을 되돌아가 함께 뛰는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합류해서 결승점까지 500여m를 동반주해 드렸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풀코스를 100번 완주한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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