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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여행 2-1 (2012.4.28)

남녘하늘 2014. 2. 14. 22:31

 

  진주 혁신도시로의 이전이 예정된 공공기관 가족들이 문화탐방과 진주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진주시의 초청으로 1박 2일간 진주를 방문하게 되었다. 우리 회사는 전주혁신도시와 진주혁신도시를 놓고 어디로 이전할지 상당한 진통을 겪다가 진주로 이전이 결정되어 올해 새 사옥을 착공할 예정으로 있다. 진주로 이전하는 공공기관이 10여개가 넘지만 진주혁신도시는 우리회사가 가장 규모가 큰 기관이어서 진주시가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고, 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진주시에서는 그동안 여러차례에 걸쳐 진주혁신도시로 이전하게 될 공공기관의 가족을 미리 지역에 초청하여 진주에 대한 이해를 미리 심어주기 위해 애써 왔었다. 이번 초청은 진주혁신도시 현장방문과 시내 관광, 그리고 내일 진주마라톤 대회에 참석하는 일정으로 되어 있었다.

 

 진주시의 지역탐방행사는 혁신도시로 이전하는 공공기관 직원 및 가족이 지역이전에 대한 막연한 이질감과 불안감을 해소하고 이주를 촉진하기 위해 2006년부터 시행해 오고 있다고 하며, 그동안 20여회에 걸쳐 1,000여명이 참여 했었다고 한다. 토지공사 시절 토지공사가 전주혁신도시로 이전할 예정이어서 전주와 무주를 방문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주택공사와 통합을 하게 되면서 진주로 이전이 확정되니 이번에는 진주를 방문하게 되었다. 진주시에서는 이전이 끝날때까지 이전기관 직원들이 진주에 대한 정서적인 친밀감을 조성하고 지역과 기업의 자매결연, 동호회 교류등을 통해 쌍방적인 교류가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회사 30여 가족이 이번 행사에 참가했다. 아침에 본사에서 출발한 버스는 4시간 정도 더 걸려 진주에 도착했다. 진주의 한정식 집에서 식사를 하고 바로 진주혁신도시 현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가 지난 2008년 한국토지주택공사로 합병한 이후 두 기관의 이전 장소가 전주와 진주로 되어 있어 어느 곳으로 이전할 것인지 상당히 논란이 많았었다. 결국 여러가지 변수에 따라 작년 5월에 진주혁신도시로 일괄 이전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공공기관 이전계획이 2005년에 세워진 이래 176개 기관이 지방으로 분산 이전하게 되었는데 LH는 11개 공공기관(한국토지주택공사, 주택관리공단, 한국시설안전공단, 중소기업진흥공단, 한국산업기술시험원, 한국세라믹기술원, 한한국남동발전, 국방기술품질원, 중앙관세분석소, 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 한국저작권위원회)과 함께 진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내 고향이 진주이지만 진주는 본사를 옮기기에는 너무 멀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이전은 결정되었고 이제 사옥을 새로 짖고 이전하는 것만 남아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진주대첩의 영웅, 충무공 김시민장군을 기려 구시가지와 혁신도시를 연결하는 남강의 다리를 김시민대교라고 이름짖고 한창 건설 작업중에 있었다. 진주 혁신도시는 진주시 문산읍과 금산면 갈전ㆍ속사리, 호탄동 일원에 건설되며, 면적은  4,078천㎡로 1만 3천세대의 4만명을 수용하는 규모이다. 기존에 건설되어 있는 진주종합경기장을 제외하고는 이제 한창 도시를 만들기 위한 토목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주변이 온통 공사장이었다. 

 

 

 

 

 

 혁신도시 건설현장을 둘러보고 나서 다시 진주시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주시에서 오늘 참석한 진주혁신도시 이전기관 직원들에게 명예시민으로 위촉한다는 증서도 준다고 한다. 진주시청이 신청사로 옮기고 나서 처음 방문해 보았는데 진주시청도 상당히 잘 지어진 건물이었다. 청사 주변도 잘 꾸며 놓았고 내부공간을 아주 넓게 쓰고 있었고, 전시실로 보이는 2층에서는 제26회 송계묵우회전이 열리고 있었다. 평소 서예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았는데 고향에 와서 수준높은 서예작품을 관람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진주시청 시민홀에서 이창희 진주시장이 참석해서 환영식을 해 주면서 직원 및 가족 133명을 명예시민으로 위촉해 주었다. 앞으로 혁신도시 이전기관 가족들이 진주에 이주하여 안정적으로 정착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한다. 그런데 명예시민증은 어디에서 가서 사용해야 되는지 모르겠네...  

 

 

 

 
 시청에서 행사를 마치고 나서 지금으로부터 420년 전에 큰 전투가 벌어졋었던 진주성을 방문하게 되었다. 올해가 임진왜란 이후 60갑자로 7번째 맞이하는 임진년이다. 나는 진주가 고향이라 셀수 없이 많이 방문했던 곳이지만 함께 온 집사람은 이번이 두번 째 방문이다.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큰 전투가 두 번 있었다. 선조 25년(1592년) 음력 10월 왜군 2만명이 침략해오자 김시민장군이 이끄는 3,800명의 군사와 민간인이 힘을 합쳐 이들을 물리쳤다.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1차 진주성전투에서 대참패한 왜군은 1593년 6월 10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2차 진주성전투를 벌인다. 2차 전투에서는 조선군 3,800여명을 포함해 6만여명의 민·관·군·승려가 모두 학살돼 임진전쟁에 가장 처절한 패전으로 기록된다. 진주성 2차 전투는 패전의 멍에를 안고 있기는 하나 6만 민관군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애국심으로 왜군의 총공격에 끝까지 저항해 비록 패했지만 왜군을 남해안으로 철수시키고 내륙 진출 의욕을 저지한 역사적인 전투였다. 

 

 

 

 

 

 

오늘은 진주시에서 관광해설사를 우리 일행에게 배정해주어 해설사의 안내로 진주성의 여러 곳을 탐방할 수 있었다. 진주를 찾는 여행객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진주성이다. 진주성에 들어서면 공원처럼 정갈하게 꾸며져 있는 내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성벽을 따라 나 있는 산책로와 잘 정돈된 수목과 조경이 진주성을 방문한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진주성의 촉석문은 1972년에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1979년부터는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의 정화사업을 시작해 2002년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진주성 안에도 민가가 굉장히 많았었는데 민가를 성밖으로 내 보내고 이렇게 복원을 해 놓으니 참 좋다는 생각이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8m이며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관광해설사가 우리를 처음으로 안내한 곳은 김시민장군 전공비였다. 김시민장군 전공비는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의 공을 새긴 비이다. 비문에는 1천명이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명의 대군을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어떤 것이 정확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시민 장군은 아주 적은 수의 군사로 왜적을 꺾고 승리했고, 영남과 호남 사이의 길목인 진주성을 사수해내며 왜병의 호남 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었다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이 비는 임진왜란 직후 진주 고을 백성들에 의해 세워졌다. 

 

 

 

 

 진주성의 최고 볼거리는 촉석루(矗石樓)다. 그 이름은 강가에 뾰족 솟은 바위 위에 만들어진 누각이란 뜻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이 거대한 누각은 평시에는 향시를 치르는 시험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북에 평양 부벽루(浮碧樓)가 있다면 남에는 진주 촉석루가 있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촉석루는 1365년 고려 공민왕 때 처음 세워져 여러 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18년 다시 세워졌지만 안타깝게도 6·25전쟁 중 또다시 불탔다. 지금 누각은 1960년에 재건된 것이다.           

 

 

 

 


촉석루에 올라서면 남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올라본 촉석루에는 시원한 강바람이 불고 있었고, 따뜻한 남녘땅의 싱그러운 신록이 아름답다. 지금도 여러 시판(詩板)이 걸려 있는 촉석루에는 일찍이 많은 묵객(墨客·먹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들렀다. 오늘날 그 자리를 관광객과 진주시민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진주성이 진주가 가지고 있는 보석이란 느낌을 촉석루에서 바라보는 남강을 보면서 다시 한번 느낀다.              

 

 

 

 

촉석루 뒤 작게 뚫린 성벽 문을 통해 강변으로 내려가면 논개(論介)가  왜장을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빠져 순절했다는 의암이 자리 잡고 있다. 논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처였는데,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제2차 진주성 전투를 할 때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일본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해 끌어 앉고 남강에 떨어져 순국했다. 1625년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의 백성들의 뜻에 따라 의암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겼다. 의암 바로 위쪽으로는 의암사적비가 서 있고, 정약용과 한용운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도 그녀의 절개와 충절을 기리는 수많은 시와 글을 남기고 있다.  

 

 

 

 


 의암으로 가기 위해서는 바위를 가로 질러 내려가야 한다. 경사가 있어 빠질 위험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너럭바위를 지나면 강물 위에 작은 섬처럼 봉긋 솟은 바위가 의암이다. 일반인들도 의암에 올라갈 수 있지만 위험하기 때문에 굳이 갈 필요는 없을 듯 싶다. 의암쪽에서 바라본 촉석루는 성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10여m 정도의 바위 절벽이 길게 늘어져 있고, 그 사이로 아름다운 선을 자랑하는 촉석루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촉석루의 왼편으로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의기사(義妓祠)가 있다. 규모가 너무 작아 보잘 것 없고 너무나 현대적 미인의 얼굴을 한 논개 영정이 실망스럽긴 하지만, 사당에 걸린 유명한 문인들의 논개의 의절을 칭송해 써놓은 글들이 감동을 준다. 처마 밑에는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 및 진주기생 산홍의 시판이 걸려 있다. 

 

 

 

 

 진주성에는 시민들이 산책과 조깅 등을 하고 있었다. 진주성은 진주시민들에게 하나의 쉼터, 하나의 생활장소가 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중에 내가 고향으로 내려 온다면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니, 지금 부러워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진주성의 촉석루는 미국 CNN이 한국 방문 때 꼭 가봐야 할 곳 50선에 선정되었다는 프랜카드가 공북문에 걸려 있었다. 시간이 되면 성안에 있는 진주박물관까지 둘러 보고 싶었는데, 함께 하는 일행들과 다음 일정이 있어 생략할 수 밖에 없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진주성 수성중군영 교대의식 행진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또한 시간이 없어 관람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