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것이 많고 아름다운 통영의 바다는 500여년 전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걸고 왜군과 맞서 싸운 역사의 현장이다. 통영이란 도시의 이름조차도 수군통제영에서 나왔다고 한다. 통영에 있는 세병관은 통제영의 중심건물로 1603년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으며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 건물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요즘은 워낙 많이 알려져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지만 그간 통영을 다녀간 사람들이 많이 놓치고 간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방문한 때에는 세병관 주위가 모두 공사중이었다. 관내 본영을 비롯해 12공방과 32동의 관아 그외부속 14동과 성곽이 복원대상이어서 세병관의 정문인 망일루로 들어가지 못하고 옆으로 나 있는 임시도로를 통해 들어가게 된다. 관람을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별로 좋은 때가 아닌듯 하지만 입장이 가능한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세병관은 경복궁의 경회루, 여수의 진남관과 함께 조선시대 평면적이 가장 넓은 3대 목조건축물로 꼽힌다고 한다. 특히 세병관은 남아 있는 군사용 건물 가운데 면적이 가장 넓은데, 지붕을 떠받치는 기둥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구조의 단층 팔작집으로 50개의 민흘림 기둥에 벽체나 창호도 없이 통칸으로 트여 있어 질박하면서도 웅장한 위용이 통제영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안으로 올라서보면 중앙 3칸만은 한 단을 올려 궐패단을 만들어 놓았다. 주변만 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병관 안쪽에도 공사를 하는 듯 세병관 안쪽에 공사용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단청이 퇴색해서 보수를 하려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세병관은 이경준(李慶濬) 제6대 통제사가 두릉포에서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선조 37년(1604)에 완공했다. 완공 이후 약 290년 동안 3도(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세병(洗兵)은 은하수를 끌어와 갑옷과 병기를 닦는다는 말로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 온 것이고, 세병관 입구인 지과문(止戈門)도 창을 거둔다는 뜻이라고 한다. 참혹한 전쟁을 거쳤기에 군대 총사령부의 이름을 전쟁을 마치고 평화를 바란다는 의미의 이름을 붙인 듯하다.
건축 당시에는 세병관, 운주당, 백화당, 중영, 병고, 장원, 홍예문, 교방청, 산성청, 12공방 등 100여동의 관아들이 즐비해 있었으나, 지금은 세병관 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그 많던 통제영 유적 중 세병관만 온전하고 나머지는 사라졌는데 현재 주변의 부지를 모두 수용해서 많은 건물을 복원라고 있는 중이었다. 다음에 세병관을 찾아오면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세병관 관람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대풍관이라는 굴요리 전문점을 찾았다. 통영이 굴이 워낙 유명한 곳이어서 이곳에 와서 굴요리를 먹고 가야 한다고 해서 미리 일정을 잡아 놓았었다. 미리 예약을 해 놓아서 많은 일행이 갔음에도 기다리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통영에서는 생각보다는 유명한 먹거리가 많은 편이였는데 이곳에서의 식사도 꽤 괜찮았던 것 같다. 맛기행을 떠난 것이 아니어서 식당 사진을 생략한다. 하지만 다음에 가족과 함께 가더라도 한번쯤 찾아가 볼만한 식당이라는 느낌은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바로 앞에 있던 김춘수 시비가 있는 조그마한 공원이 있어 사진 한장을 남겨본다.
식당 바로 앞에 항구여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통영의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 한장을 남겨 보았다. 이제는 바다를 많이 보아서 그다지 감흥이 일지도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남해로 이동했다. 남해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으로 제주도, 거제도, 진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남해는 내 고향에서 가까운 어릴 때부터 여러차례 방문을 했지만 주로 해수욕장에 갔다 온 기억만 남아 있었던 섬인데, 이번 여행을 통해서 임진왜란 전적지로서의 남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19번 국도를 따라 남해군에 들어가면 첫 번째 만나는 역사적 유적지가 설천면 노량리에 있는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 충렬사이다.
남해바다에는 충렬사는 여럿 있다고 한다. 여수에도 있고 우리가 다녀온 통영에도 있다. 그러나 남해의 충렬사에는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있어 더 유명한 장소이다. 이순신 장군이 관음포에서 전사한 후 시신을 삼개월 동안 모셨던 자리인데, 이 가묘에서 전라도 고금도를 거쳐 충남 아산으로 모셔갔다고 한다. 충렬사 외삼문입구 우측에는 일중 김충현이 '노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 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니라'라고 한글로 쓴 중건비가 세워져 있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34년이 되는 1632년에 지역의 선비들이 노량해전과 충무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던 조그만 사당에서 출발하였다.1659년에 통제사 정익이 다시 지었고 1662년에는 나라에서 충렬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외삼문을 지나면 우측 높다란 계단 위에 문마다 태극마크가 그려진 내삼문이 자리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방문한 때에도 사당 보수중이어서 충렬사 내부에는 들어가 볼 수가 없어서 사당의 담을 따라서 뒷쪽으로 돌아가보니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보였다. 사당 내부에는 충무공의 위패를 모셔 놓았고, 위패를 중심으로 위쪽은 관복을 입은 충무공을, 우측에는 갑옷을 입은 모습을, 좌측에는 거북선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충렬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공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그 공원 한켠에 남해척화비(南海斥和裨)가 세워져 있다.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와 신미양요(辛未洋擾:1871)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서양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백성에게 경고하기 위해 한양을 비롯해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자 이 지역에서도 척화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지역의 척화비와는 달리 지붕돌을 올려놓은 것은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열강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비가 철거되었지만 이 비처럼 몇기가 남아 있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주문(主文)을 큰 글자로 새기고,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작은 글자로 새겨 놓았다. 대원군의 권세가 이 남쪽 끝까지도 이르렀음을 알 수 있는 현장으로, 세계화라는 넘치는 화두 속에서 아직도 이렇게 세워져 있는 척화비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봄이 어떠한가 싶다. 하지만 그당시 세계화의 물결에 동참하지 않음으로서 받은 우리의 고난도 함께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충렬사 앞바다에도 거북선이 한척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 거북선은 20여년 전에 학자들의 고증으로 본래 크기대로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내부에는 각종 무기류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들이 갖추어져 있다고...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에게 관광지로서의 볼거리와 체험 장소로 이용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일정이 바빠서 거북선 내부 관람은 하지 못하고 거북선을 배경으로 사진 한장만 남기게 된다. 아이들과 함께 온다면 썩 괜찮을 것 같다.
충렬사가 있는 노량마을을 떠나 남해읍 방향으로 조금 가다보면 우측에 충무공 전몰유허지인 이락사가 나온다. 이곳 관음포 해역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신 곳이다. 이 앞바다에서 도망하는 왜적들을 무찌르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친 때가 1598년 (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이다. 이순신 장군이 장렬한 전사한 뒤 판옥선에서 처음 뭍으로 옮겨진 이곳에 234년이 지난 1832년(순조 32)에 이르러 이락사(李落祠)와 이충무공전몰유허비(李忠武公戰歿遺墟碑)가 세워졌다.
이락사와 첨망대가 있는 곳으로 가는 계단이 있는 곳 우측에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戰方急 愼勿言我死)라는 내용으로 1998년 12월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맞아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유삼남대장이 글을 썼다고 한다.
이락사(李落祠)는 이순신 장군이라는 큰 별이 떨어진 곳을 기리는 사당이란 뜻이다. 충무공이 이곳 앞바다 관음포에서 순국하시고 충렬사로 옮겨가기 까지 유해를 수습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락사 안에 세워진 비석에는 이순신장군에게 충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에 추증한다는 뜻의 충무공 유허비가 있다. 충무공이 순국하기전 부터 이 동네는 李落浦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명은 충무공의 전사에 앞서 이미 죽음을 예언했다면 참으로 신기한 일인데 전해지는 말 자체가 사실인지 확인은 불가하다. 이락사는 역사적인 의미를 제외하면 그다지 볼 거리는 없다. 오히려 이락사를 지나서 있는 첨망대가 많은 편이다.
이락사 옆을 돌아 노량해전의 현장이 내려다 보이는 첨망대까지 가는 길은 이처럼 멋진 송림의 오솔길이 이어진다. 약간의 오르막 경사는 있으나 소나무 숲길에 흙길로 되어 있어 발걸음을 내딛는 느낌이 부드럽다. 동백나무가 소나무 사이에 심어져 있어 동백꽃이 피었을 때는 또 다른 운치가 있을 듯하다.
이락사에서 500여m 정도 떨어진 길 끝에는 첨망대(瞻望臺)가 있다. 첨망대에 올라서면 노량해전이 끝났던 관음포 앞바다와 멀리 광양만의 광양제철소, 하동군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다. 첨망대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바다가 관음포인데,이락파와 노량을 연결하는 해역으로 정유재란 때 충무공이 최후의 해전을 치른 곳으로 쫓겨 달아나는 왜장 고니시를 추격하다가 충무공이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기도 하다. 첨망대 안에는 뭇 객들의 한시(漢詩)가 걸려 있으며, 첨망대기(瞻望臺記) 현판이 걸려 있어 첨망대를 건립하기까지의 상황을 알려 주고 있다.
첨망대에서 보이는 노량해전의 현장.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은 1598년(선조 31년) 11월 소금도를 출발해 남해안의 왜적을 소탕하면서 동진하다가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적과 최후의 결전을 벌리게 된다. 왜적은 서둘러 퇴각을 하다가 뱃길이 막히는 관음포로 쫓겨왔다. 이곳 노량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 1만 7,000명과 배 86척, 명나라 수군 진린이 이끄는 2,600명의 수군과 배 63척으로 6만여명을 태운 왜선 500여 척을 격파하는 임진왜란 최후의 결전이 11월 19일(음력) 시작된다. 결국 노량해전은 근접전으로 벌어지게 되었고 이 때 이순신장군은 한 척의 왜선도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친히 진두에 나서, 왜선 침몰 100여 척, 나포 100여 척, 파손 200여 척의 전과를 거둔다. 도주에 성공한 배는 겨우 백여 척에 불과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 치열한 근접 전투에서 이순신장군은 적의 유탄을 맞아 전사한다.
첨망대를 배경으로 이번 답사 여행을 함께 온 일행들과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간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임진왜란의 역사 현장을 체계적으로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함께 해준 문화해설사 선생님의 설명도 굉장히 유익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많은 것을 짧은 시간에 배우게 되었다. 다음에 가족과 함께 이 역사현장을 한번 더 둘러볼 생각이다. 1박 2일간 이루어진 일정이고, 서울에서 멀리 내려 오느라 한정된 시간에 모든 전적지를 둘러 볼 수는 없었지만 진주와 통영, 남해를 중심으로 한 충무공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국내여행 사진 > 즐거운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순 고인돌 공원 (2015.5.2) (0) | 2017.04.11 |
---|---|
안동 병산서원, 겸암정사 방문 (2015.3.18) (0) | 2017.03.27 |
진주, 통영 답사여행 3-2 (한산정, 통영케이블카) (2012.10.9) (0) | 2014.06.28 |
진주, 통영 답사여행 3-1 (진주성, 한산도) (2012.10.9) (0) | 2014.06.15 |
실학박물관 (2012.9.4) (0) | 2014.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