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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병산서원, 겸암정사 방문 (2015.3.18)

남녘하늘 2017. 3. 27. 00:17


 안동에 출장 갈 일이 있어서 황종석사장과 함께 안동에 내려갔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안동에 도착할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제대로 체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비가 내리니 지방 출장행이 조금 불편스럽다. 처리해야 할 일을 보고 나서 오늘 안동에서 조우한 정도사님이 안동 하회마을에서 가까이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안내해 주었다. 안동을 여러번 와 보았지만 병산서원은 처음 방문한 것이다. 병산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재상 류성룡(柳成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하회마을 입구를 지나 동쪽으로 더 들어가야 하는데 유독 이 길은 아직도 비포장 구간이다.    






 병산서원은 도동서원, 도산서원, 소수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조선시대 5대 서원으로 손꼽힌다. 1863년(철종 14)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사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라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사원의 입구인 복례문을 지나면 길죽한 모습의 이층 누각이 만대루(晩對樓)다. 만대루는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물로서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봄비가 조금 내리다 그칠줄 알았더니 생각보다는 제법 굵은 빗방울이다.  




 만대루를 지나 병산서원의 현판이 붙어있는 입교당으로 들어섰다, 입교당은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강당의 역할이다. 원래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고 명륜당이라고도 불렸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이며,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강학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와 서쪽의 경의재(敬義齋), 세 부분으로 나뉜다. 양쪽 방에는 온돌을 들이고 중앙의 강학당은 3칸의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툇마루가 마련된 명성재에는 서원의 원장이 생활했고, 서쪽의 경의재는 이른바 교무실의 기능을 담당했다고 한다.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서원의 여러 곳을 둘러 보았을텐데 생각보다 비가 많이 내려서 이곳 저곳 둘러볼 상황이 안 되었다. 비가 온다는 것을 몰라서 우산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시골에서 우산을 준비할 수도 없고, 그냥 입교당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면서 정도사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비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내린 비가 서원의 앞마당에 물줄기를 형성하면서 흐른다. 병산서원을 안내해 준 정도사님과 황종석사장님과 함께.   






 낙동강을 끼고 있는 병풍같은 산은 화산이라고 하는데 병풍을 두른 듯하다고 하여 병산이라고 부든단다. 그래서 병산서원의 이름이 지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화산에 올라 병산서원을 내려다 보는 풍광도 멋 있다고 하는데 오늘은 비로 인해 할수가 업다. 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만대루에 올라가서 조금 여유있는 시간을 보냈을텐데 비때문에 해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만대루는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누각으로 주축보는 복원된 목재가 아니라 지어진 이후 지금까지 그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병산서원에서 나와 다시 안동시 풍산면 광덕리에 위치한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의 별서인 겸암정사(謙巖精舍)를 방문했다. 류운룡의 호는 겸암(謙嵓)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서애 류성룡 선생의 세 살 위 형이다. 이곳 겸암정사는 겸암 선생이 명종 22년(1567년)에 세웠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곳이라고 한다. 겸암이란 호는 퇴계 이황이 류운룡의 학문에 감복하여 지어준 것으로, 겸허한 자세로 내적 수양에 정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현재 겸암정사에는 후손이 거주하면서 민박도 하고 다과도 판매하고 있었다. 정도사님이 나와는 인연이 깊은 장소라고 말해준다.   







 남쪽 절벽 위쪽에 사랑채가 있고 살림을 하는 안채는 정사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퇴계 이황이 쓴 겸암정 현판이 걸린 바깥채는 정자채이고, 안채는 바깥채를 보조하는 살림채로 아늑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안채의 옆면과 뒤쪽에는 반달 모양의 담장이 둘러져 있다. 현재 살림채에는 사람이 살고 있고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차를 팔고 숙식도 제공하고 있는 모양이다. 안채에는 배우고 싶으나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돈을받지않고 가르쳐준다는 뜻의 허수료(虛受寮)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1979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는 겸암정사는 보통 정자와는 달리 서당 구실을 했다고 한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가운데에 4칸짜리 대청을 두고 오른쪽과 왼쪽에 방이 하나씩 있다. 오른쪽 한칸의 방 앞에는 대청과 이어진 1칸의 마루가 있다. 사랑채의 누마루에 앉으면 절벽 아래로 흐르는 강물과 멀리 보이는 마을의 평화로운 모습이 아련히 눈에 들어온다. 벼슬길을 멀리하고 자연 속에서 학문에만 전념하고자 했던 겸암의 면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겸암정사 현판이 걸린 사랑채에 올라서 대추차 한잔을 시켜 놓고 꽤 오랫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옛 선조와 교감을 위해서 방에서 정좌하고 앉아서 묵상을 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썰렁한 정자에 앉아 있으려니 서늘함이 몰려 왔는데, 오히려 정신은 더 맑아지는 느낌이다. 내가 옛날 이 정자의 주인이었으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사랑채에는 각종 현판이 많이 걸려 있었는데 강설하고 익히는 곳이라는 강습재(講習齋)와 조용히 학문을 닦아 간다는 뜻의 암수재(闇修齋) 현판이 특히 눈에 띈다.





 겸암정사 누마루에서 내려다 보면 강 건너편으로 모래사장과 송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절벽에 자리잡은 정사는 마당이 없지만, 멀리 바라보이는 풍경을 안마당으로 끌어들여서 더없이 넓고 시원한 느낌을 갖게 한다. 강건너 송림 뒷편으로는 안동 하회마을이 있고, 절벽 아래로 낙동강이 굽이쳐 흐른다. 겸암 선생이 처음 이곳에 정사를 지을 때가 스물 여섯살때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길이 없어 나룻배로 하회마을을 왕래했다고 한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부용대 절벽을 통해 동생이 있었던 옥연정사로 갈수 있는 소로가  나오는데 지금은 출입금지라고 한다. 






 겸암정사 사랑채 옆으로 쪽문이 나 있어서 그곳으로 나가 보았다. 쪽문을 나서면 다시 조그마한 공간이 나오는데 끝에 능파대(凌波臺) 표시석이 있다. 언덕 아랫쪽으로 능파대가 있는 모양이다. 뒷쪽으로는 더 이상 길이 없어서 갈 수가 없고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능파대 표시석이 있는 곳에서 낙동강을 내려다 보면 크고 작은 두 바위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놓여 있다. 이른바 형제 바위로 불리는 입암(立巖)이다.   







 겸암정사에서 완만한 산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하회마을의 전경이 조망되는 부용대(芙蓉臺)가 나온다. 부용대는 안동 하회마을의 서북쪽 강 건너 광덕리 소나무 숲 옆에 있는 해발 64m인 절벽이다. 하회마을에서 보면 강 건너편이라 가까운 거리이지만 차량으로 이곳까지 올려면 꽤나 멀리 돌아와야 한다. 정상에서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데, 부용대라는 이름은 중국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부용은 연꽃을 뜻한다고 한다. 비가 그쳐서 구름이 걷히고 있어 하회마을의 모습이 몽환적으로 보인다.   






 그동안 안동과 하회마을을 여러번 왔어도 이렇게 하회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부용대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보면 그냥 절벽같은 언덕이었는데... 긴 타원형의 하회마을과 하회마을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의 줄기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또한 하회마을이 자랑하는 만송정 숲이 푸르른 자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다음에 하회마을 구경을 오는 사람이 있다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꼭 같이 방문하라고 추천해야 할 것 같다. 강변 언덕위여서 시원한 바람도 불어와 멋진 풍광과 함께 상쾌한 기분이다.    





 하회마을의 왼쪽편은 평민이 거주하는 곳이였는지 거의가 초가지붕이고, 마을의 우측은 양반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였는지 기와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부용대 반대쪽에는 서애 류성룡이 노년에 머물기 위해 지은 옥연정사가 있다고 한다. 서애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옥연정사에 머물면서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국보 제132호)을 썼다고 전해진다. 시간이 되면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차를 반대쪽에 세워 놓아서 다음에 안동에 올 때 방문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