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병관은 얼마 전에도 다녀 왔던 곳이지만 가족과 함께 가보지 못한 곳이라 다시 방문했다. 오랫동안 보수공사를 하고 있더니 이제 공사를 마치고 세병관 전체를 개방했는데, 그전에 받지 않던 입장료도 받고 있다. 규모도 많이 커지고 볼거리를 많이 만들어 놓았다. 볼것이 많고 아름다운 통영의 바다는 500여년 전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걸고 왜군과 맞서 싸운 역사의 현장이다. 통영이란 도시의 이름조차도 수군통제영에서 나왔다고 한다. 통영에 있는 세병관은 통제영의 중심건물로 1603년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으며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 건물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관내 본영을 비롯해 12공방과 32동의 관아 그외부속 14동과 성곽이 복원대상이었는데 이제 복원을 끝낸 모양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수항루(受降樓)가 있다. 적국이 항복할때 사용한 누각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일본군이 항복을 했다가 보다는 임진왜란의 승전을 기념하기위하여 숙종3년에 건립한 것이다. 이름만 수항루인 것이다. 원래는 통영성 남문 밖에 위치하였는데, 해안매립으로 인하여 19876년 이곳에 복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항루와 세병관 외삼문 성격을 띠고 있는 망일루와 크기와 성격이 비슷하다. 같은 누각이라서...
이제 세병관(洗兵館)으로 올라 간다. 세병관은 경복궁의 경회루, 여수의 진남관과 함께 조선시대 평면적이 가장 넓은 3대 목조건축물로 꼽힌다. 특히 세병관은 남아 있는 군사용 건물 가운데 면적이 가장 넓은데, 지붕을 떠받치는 기둥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구조의 단층 팔작집으로 50개의 민흘림 기둥에 벽체나 창호도 없이 통칸으로 트여 있어 질박하면서도 웅장한 위용이 통제영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안으로 올라서보면 중앙 3칸만은 한 단을 올려 궐패단을 만들어 놓았다. 지난번에 왔을때에는 세병관 안쪽도 공사중이었는데 공사를 마치고 안쪽에도 들어갈 수 있게 해 놓았다.
세병관은 이경준(李慶濬) 제6대 통제사가 두릉포에서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선조 37년(1604)에 완공했다. 완공 이후 약 290년 동안 3도(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세병(洗兵)은 은하수를 끌어와 갑옷과 병기를 닦는다는 말로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 온 것이고, 세병관 입구인 지과문(止戈門)도 창을 거둔다는 뜻이라고 한다. 참혹한 전쟁을 거쳤기에 군대 총사령부의 이름을 전쟁을 마치고 평화를 바란다는 의미의 이름을 붙인 듯하다.
삼도수군통제영은 건축 당시에는 세병관, 운주당, 백화당, 중영, 병고, 장원, 홍예문, 교방청, 산성청, 12공방 등 100여동의 관아들이 즐비해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세병관을제외하곤 모두 훼손 되었는데, 훼손된 주변의 부지를 모두 수용해서 대부분 복원을 했다. 복원한 건물 가운데 12공방이 있다. 12공방의 이름은 딱 12개의 공방이라는 것은 아니고 그 만큼 많은 공방이란 뜻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무기를 만드는 방이 생기고, 전쟁이 끝나면 생필품을 만드는 방이 생기는 식으로 한 공방이 없어지고, 생기고를 반복하여 12개가 11개 아니면 13개가 되기고 하였다고 한다.
12공방으로 가는 길목에 백화당이 있다. 백화당은 제6대 통제사가 건립했는데, 중국 사신이나 손님을 맞이할때 사용했던 통제사의 접견실이라고 한다.
백화당을 지다면 12공방이 나온다. 12공방은 통제영에서 필요한 군수물자를 직접 제작하고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관아의 공방으로,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나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을 통제영이 폐영되는 1895년까지 했으니 이곳 통영에 예술가가 많이 탄생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12공방은 처음에는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과 조정에 올리는 진공품에 국한되었었지만 통제영이 점점 크게 번성하자
부채, 장석, 자개, 그림, 가죽, 철물 등 다양한 생활용품까지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12공방은 부채를 만드는 선자방, 갓을 만드는 입자방, 상자류를 만드는 상자방, 가구를 만드는 소목방, 옻칠을 하던 칠방, 각종 철물 및 병기를 만드는 야장방, 자개를 붙여 나전칠기를 만드는 패부방 등
다양한 공방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복원은 해 놓았는데 아직은 썰렁한 느낌이다.
12공방에서 나와 세병관에서 내아로 가는 길목에는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58기를 모아 4줄로 세워 놓았다. 당연히 이순신 장군의 공덕비도 보인다.
세병관에서 동문으로 나가면 내아군이 있는데, 통제사가 업무를 보던 영역으로, 여기도 꼭 가볼만한 곳이다. 내아군 내에는 운주당과 이순신장군의 관사인 경무당이 자리하고 그우측으로 살림채인 내아가 자리한다. 중앙의 관아와 달리 지방의 관아에서는 관리의 식구들이 살림하는 내아가 있어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 공존하는 특징이 있다. 내아군의 가운데 중심건물인 운주당이다. 통제사가 통제영 군무를 보는 집무실이다. 12공방보다는 잘 꾸며 놓아서 볼거리가 많았다.
운주당 마당에는 투호(投壺)놀이 기구가 놓여 있어서 잠시 놀이를 해 본다. 주말이지만 통영에서 숙박을 하고 조금 이른 아침에 삼군통제사에 구경을 왔더니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여유롭게 돌아 다닐 수 있었고, 놀이기구도 이용할 수 있었다. 용인민속촌에서 투호놀이를 해보고는 오랫만에 해 보았다. 내아군 좌측으로 병고가 있었고. 안쪽에는 병사들의 복식과 더불어 각종 병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생각보다는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이 있어, 가족단위의 방문객이 오더라도 좋은 듯 싶다.
세병관과 삼도수군통제영 구경을 마치고 수항루앞에 있는 통영향토역사관을 방문했다. 입구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통영지도가 있었는데 이 자료를 비롯해서 역사관 안에 있는 자료를 사진 찍지 말라고 되어 있었다. 요즘 세계의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도 프래쉬와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으면 사진 찍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추세인데 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개인이 소장한 자료로 저작권에 문제가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자료라면 굳이 역사관에 전시를 해야 하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사진을 찍어도 괜찮아 보이는 몇몇 전시물만 찰영하고 역사관 구경하고 나왔지만 찜찜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기분이 안 좋아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세병관에서 보았던 관광객이 바로 앞에 있는 향토역사관에는 전혀 보이지 않아서 우리가 관람하는 동안 우리 가족밖에는 없었다. 역사적인 장소와 건물만 보고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료와 함께 유물을 구경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시는 그런대로 잘 해 놓았다는 생각이다.
삼도수군통제영 입구에서 조금 윗쪽에 있었던 통영향토역사관을 구경을 마치고 망일루 앞에서 사진을 한장 찌고 다음 여정을 향해 출발한다. 지난번 왔을 때에 비해서 공사도 마무리하고, 입구도 잘 정비해 놓아서 보기가 좋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복원하는데 예산을 많이 쓰고 있어서 좋아 보인다.
세병관 관람을 마치고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에 있는 충렬사(忠烈祠)로 이동했다. 주차장을 지나 골목을 돌아서니 충렬사 홍살문이 보이는데 너무 길가에 세워져 있어 불안해 보인다. 앞쪽에 공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이 홍살문은 1663년 현종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출렬사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강한루(江漢樓)가 보이고, 왼편으로 충렬사 설명문이 있고 오른편으로 오래된 동백나무가 있다. 충렬사는 매년 봄 가을 두차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았다고 한다.
모 대학교 경주캠퍼스 국문학과 학생들이 단체로 문화탐방을 나왔는데 단체로 관람하니 문화해설사가 함께 다니면서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문화재는 그냥 둘러 보는 것보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 몇 배의 교육적인 효과가 생기는데 함께 따라 다니면서 열심히 경청했다. 덕분에 모르고 지날 수 있는 여러가지를 알게 되었다. 입구에 있는 동백나무는 수령은 약400년으로 추정이 된다고 하는데 경남도의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한다. 통영시의 나무(市木)와 꽃(市花)는 모두 동백나무 동백꽃이라고 한다. 동백꽃이 필 무렵이 되면 이곳 바닷가 어민들은 한해동안 비바람이 순조롭기를 기원하며 풍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누각인 강한루를 통과해서 올라가면 충렬사 외삼문(外三門) 입구가 나온다. 충렬사 내부는 사당이라 그런지 굉장히 조용하고 한적했다. 대학생 단체 관광객이 없었다면 아주 조용하게 관람을 했을 것 같다. 문화해설사를 따라가면서 설명을 들으려고 명나라 신종이 충무공에게 하사한 의장물 등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은 다음에 보기로 하고 따라 나섰다. 외삼문은 정문에서 사당에 이르는 삼문중 바깥쪽 삼문으로, 좌우에 위치한 비각과 조화를 이루어 조선후기 건축의 백미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에 제향을 올리는 정당으로 가는 길에는 문과 담이 계속해서 만들어져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숭무당(崇武堂)과 경충재(景忠齋)가 있다. 숭무당은 충무공의 제사와 충렬사 관리 업무를 담당하던 곳이고, 경충재는 지방의 청소년에게 학문을 가르키던 서당이었다고 한다. 충렬서원으로도 불리었는데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제외되어 존속된 유서깊은 서원이다.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숭무당과 경충재처럼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양쪽으로 있다. 동재는 사당의 동쪽에 위치한 건물로 제례를 앞두고 제관들이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고 의복을 갖추어 입는 곳이라고 한다. 문이 모두 닫혀 있어 내부 관람은 하지 못하고 설명만 들으면서 지나가게 된다.
외삼문과 중문을 지나면 끝으로 사당 입구의 내삼문(內三門)이 나온다. 내삼문은 정당의 출입문으로 가장 안쪽에 있는 문으로, 조선중기의 건축양식으로 솟을 삼문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내삼문을 지나면 충렬사 정당이 나타난다. 정당안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충무공의 영정 양쪽으로는 이순신장군의 소장품을 그린 충렬사 팔사품 병풍을 그린 채색화가 전시되어 있다. 충렬사 정당 양옆으로는 은행나무가 있고, 뒤편으로는 대나무숲으로 되어 있다. 함께 온 학생들과 함께 이순신 장군 영정에 묵념하고 주변을 관람한다.
충렬사는 이순신장군의 영령에 제사를 올리고 장군의 정신을 후대에까지 기리기 위해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들이 약 300년동안 제사를 받들어 온 신성한 장소이다. 일제 강점기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광복을 맞아 다시 복원한 유서깊은 사당이다. 정당 앞으로는 동재와 서재의 건물이 있는데, 서재는 제례에 사용될 제물을 다루는 방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가운데 마루에 거북선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건물만 있을 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는데, 거북선 모형이 있으니 서재를 배경으로 사진을 많이 찍는다.
나가는 길에 보인 강한루 안쪽 편에는 영모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충렬사를 나가면서 입구쪽에 있던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갈까 생각하다가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너무 좋아서 전시관은 생략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충렬사의 규모는 그리 큰편이 아니었지만,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너무 귀에 들어오게 잘해 주어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우리고 볼 수 있었다. 다음에 제사를 지낼 때 기회가 된다면 한번 와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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