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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융릉, 건릉 (2015.9.6)

남녘하늘 2017. 8. 27. 00:08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그동안 가보지 않은 화성의 융건릉을 방문했다. 경기마라톤 대회가 융건릉에서 가까운 수원대학교에서 열리곤 했는데, 대회를 마치고 나면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가보지 못했었다. 집에서 직선거리도 1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곳인데 한번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다. 


 화성에 있는 융릉과 건릉은 조선 제 22대 임금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신 융릉과 정조와 그의 비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이 있는 곳이다. 화성 8경중 제1경에 속할 정도로 사계절 모두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지만 특히 그중에서도 겨울 노송에 하얀 백설이 덮힌 풍경은 가장 추천할 만하고 한다. 그렇다고 눈 내릴때까지 또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다. 

 

 

 



 1762년 이른 봄. 세자로 책봉된 영조의 둘째 아들 선(사도세자)은 뒤주 속에 갇혔다.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한 영조의 뜻을 거역하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왕권을 물려받을 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인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모략과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선시대의 정치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융릉은 당파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비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묘다. 본래 경기도 양주군 배웅산에 있던 것을 정조가 즉위하면서 그 해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했다. 오른쪽에 있는 융릉부터 먼저 관람하고 나서 건릉을 돌아보기로 한다.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융건릉 안쪽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시선을 입도하듯 쭉쭉 뻗은 소나무다. 정조는 생전에 하지 못한 효를 다하려는 마음으로 현릉원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는데, 야트막한 구릉에 숲을 우거지게 하고 입구에는 소나무를 심은 것이다. 융릉과 건릉을 둘러싸고 있는 솔숲을 걷으면 기분도 상쾌해지고 숲이 아름답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겨울에 눈에 내리면 더 운치가 있을 듯하다.  

 

 



 여의주를 상징하는 원형 연못인 곤산지는 정조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왕이 되지 못한 한을 풀어 드리고자 인위적으로 만들었던 연못이 라고 한다. 다른 조선시대 왕릉을 많이 가 보았어도 보지 못했던 원형 연못이다. 

 

 



 융릉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누가 봐도 최고의 명당임에 틀림없다. 왕릉을 지키고 선 문인석과 무인석은 멀리서 봐도 위엄이 느껴진다.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합장릉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던 정조의 효성이 빛어낸 작품으로

조성왕릉에서 가장 아름답게 조성이 되어 있다고 한다.  

 

 

 



 왕과 왕비의 신좌를 모시고 각종 제사를 지내는 정자(丁字)형태의 건물을 정자각이라 한다. 정자각 건물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정면 3칸과 측면 1-2칸 정도에 맞배지붕이며 능제를 지내는 민묘의 상석과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 융릉의 오른쪽 끝에는 비각이 있다. 비각은 능에 세우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이다. 어릴때 여주에서 1년을 살았던 적이 있는데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 능에 놀러 가서는 능아래 언덕에서 뛰어 놀았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일반인은 출입통제가 되어 있어서 능 가까이 갈수가 없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은 능 앞의 넓은 공터에서 뛰놀고 있다.    

 

 

 

 



 융릉을 둘러보고 난 후엔 융릉 옆으로 숲길이 나 있는데 융릉 산책로라 적힌 이정표가 있다. 이 길은 융릉과 건릉을 감싸고 있는 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다. 둘레길은 길의 폭이 좁아져서 두사람이 나란히 걷기에 좋다. 숲은 상수리나무와 소나무가 주종인데 능선에서 만나는 소나무는 융건릉으로 드는 초입에 늘어선 기품이 있는 소나무와는 거리가 멀다. 제멋대로 뒤틀리면서 자란 것이 대부분이다. 중간 중간 오솔길에 벤치도 있어 쉬어 갈수 있게 되어 있다.     

 



 

 



 능선을 따라 가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거의 없어 편안한 길이다. 가벼운 산책로로 힘을 써야 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오솔길은 건릉에 가기 전에 두 번 갈림길이 나온다. 두 길 모두 건릉과 융릉 사이로 이어지는 듯하다. 산책을 짧게 끝내고 싶다면 갈림길에서 아래로 내려서면 정문이나 릉이 나온다. 나는 이 산책로가 너무 좋아, 오전에 일찍 왔다면 오래 머물고 싶었다. 굳이 멀리 소풍을 갈 것이 아니라 주말엔 가족들과 함께 융건릉에서 하루를 보내도 좋을 듯하다. 

 

 



 둘레길을 다 합쳐도 3km 정도 남짖이다. 주말이라서 사람이 산책로에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다들 건강때문에 많이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중간에 화성시와 수원시가 보이는 전망대가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수원 공군비행장도 보이는 듯하다. 

 

 



 융릉을 출발해 산책길을 따라 30분이면 건릉 입구까지 갈 수 있다. 건릉은 조선 제 22대 임금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문무를 겸비한 성군이자 혁신적인 군주로 규장각을 두어 학문에 힘쓰고,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을 쌓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던 왕이다. 원래 정조의 능은 아버지 옆에 묻히고 싶어 융릉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이곳으로 옮겨 합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봉분을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둘러싼 것 외에는 규모와 형식이 융릉과  비슷한 형태라고 한다.  

 

 



 건릉은 능 아랫쪽에서 능의 모습이 잘 안보인다. 관리상 어려움은 있겠지만 가능하다면 봉분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한층 더 관리를 잘해야 하겠지만 아쉬음은 많다. 어릴 때에는 왕릉에 가서 봉분 근처까지도 가 보았었는데... 

 

 



 때가 되면 정치는 세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상왕이 되어 화성 행궁에 와서 살고 싶어 했는데 정조는 일찍 죽는 바람에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정조의 통치 기간은 24년에 지나지 않지만 영조에 이어 탕평책을 유지하면서 각 정파 사람을 고루 기용하였고, 조선시대를 피로 물들였던 당파싸움을 완전히 제거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확립했다. 또 경제는 농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상공업의 발달로 새로운 국가의 부가 축적되도록 실학과 기술 혁신을 강조하는 북학을 포용했다. 군주로서의 사명감이 투철했고 백성들의 삶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수많은 개혁적 정책들을 만들어 낸 임금이었다.   

 

 

 



 융건릉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융건릉에 대한 내용을 알려주는 융건릉 역사문화관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규모가 적어서 크게 기대하지 않고 들어갔는데 좁은 공간을 아주 잘 활용해서 많은 것을 보여 주었다. 왕릉을 보고 나올때 방문하는 것보다는 입장하기 전에 방문해서 사전 지식을 얻는 편이 좋을 듯하다. 정조대왕 무덤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알려주는 동영상도 있었고, 정조대왕과 사도세자의 일생에 대해 자세한 설명도 있다. 

 

 

 

 


 장헌세제(사도세자)의 능 이름이 처음에는 수은묘라 불러지고 이후 정조대왕이 현륭원으로 격을 높였다가 다시 지금의 장소로 옮기면서 릉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내용도 알려준다.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생애를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고,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가계도가 자세하게

나와 있다. 정조의 어머니인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는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평가 받는 회고록 한중록을 남겼는데, 오늘 이곳에서 내용을 읽으니 학교시절에 배웠던 것이 다시 기억난다.    

 

 

 



 현릉원에서 오리 떨어진 곳에 절 하나를 지어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게 했는데 그 절이 용주사다.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죽어서 아버지 곁에 있기를 소망했고, 그의 유언대로 융릉 곁에 묻혔다. 그 두 개의 왕릉을 합쳐 융건릉, 혹은 화산릉이라고 부른다. 융건릉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서 용주사도 한번 들러 볼까 생각했었는데 한번에 모두 보면 감흥이 덜할 것 같아 용주사는 다음에 방문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