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에서 고란사와 낙화암 등을 구경하고 나와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국립부여 박물관을 방문했다. 이번 여행은 역사문화 관광이기에 부소산성과 정림사지의 출토 유물, 능산리사지에서 발견된 금동대향로 등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 구경부터 하는 것이 순서에 맞을 듯 해서였다. 백제의 옛 건물을 재현한 박물관 건물 내부는 중앙으로 조성한 작은 정원 안 석조를 중심으로 시대별·주제별로 정리되어 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선사실, 역사실, 불교미술실과 야외전시실에 주로 백제의 유물을 중심으로 1,000점이 넘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보아야 할 것은 많은데 한번에 모두 볼 수가 없으니 유물 중에서도 관심이 가는 것 위주로 보게 된다. 박물관만 제대로 보려고 해도 몇 시간은 훌쩍 지나갈 듯하다.
전국의 국립박물관은 입장료가 무료인데 부여박물관도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국민으로 하여금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무료입장을 하고 있지만 최소한의 비용은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박물관 가운데 있는 커다란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보물 제194호로 지정된 부여석조로 돌 내부를 파내어 물을 저장했었다고 한다. 백제 왕궁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평일이어서인지 주차장도 여유가 있고, 박물관 내부에도 어린 학생들이 많이 있을 뿐, 붐비지 않아서 너무 좋다.
제 1 전시실(충남 선사문화 대표요적실)에 들어가면 벽면에 한눈에 보는 백제연표가 붙어 있어서 사진을 찍어 놓았다. 내부 전시관에서 사진 찍는 것에 대한 금지 규정이 보이지 않아서 후레쉬를 사용하지 않고 사진 몇장을 찍었다. 요즘은 사진 찍는 것에 대해서 관대하지만 과거에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곳이 많았는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곳에는 부여 송국리 선사취락지 발굴 결과를 토대로 청동기 시대의 마을 모형을 꾸며 놓았고 부여 송국리 청동기 시대 마을과 무덤 출토 유물 등 청동 무기와 제기·토기 등이 전시되어 선사 시대 충남 지역 사람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많은 관람객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곳은 제 2 전시실에 있는 국보 제 287호 백제금동대향로이다. 백제의 공예사에서 나아가 우리나라의 공예사와 문화사까지도 다시 쓰게 했던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에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능산리사지에서 발견되었다. 거의 녹슬지 않고 제 모양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공기가 통하지 않는 진흙 속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뚜껑, 몸체, 받침으로 구성되며 높이 61.8, 무게 11.85kg으로 향로 중 비교적 큰 편인 백제금동대향로는 여러 상징들로 만물의 생명이 연꽃에서 탄생한다는 불교의 연화화생관이 담겨 있다고 한다. 남들처럼 이곳에서 한참을 시간을 보내면서 관람을 했다. 설명을 들으면서 보니 왜 중요한 유물인지 알 수 있었다.
충남 백제문화권은 신라문화권 개발에 밀려 비교적 늦게 빛을 보게 되었다. 50년 전만 해도 백제와 관련된 유물과 정보는 현재보다 현저히 낮은 양과 수준이었다고 한다. 현재도 미륵사지, 제석사지 등 백제유적 곳곳에서 정비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유물의 양이 많아지면서 부소산에 있는 박물관을 이곳으로 옮겨와 다시 문을 열였다고 한다. 볼 것은 많은데 문화해설사를 따라 다니면서 이야기를 듣자니 시간이 많이 흐른다. 이곳에서 제대로 모든 설명을 들으면서 보낼 것인지 중요한 몇 가지만 보고 다른 곳을 구경해야 할지 갈등이었는데 결국 중요한 것만 보고 다른 곳을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제3 전시실 입구에는 고대 동아시아의 대외교류와 관련된 내용이 벽면에 안내되어 있었고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온화한 표정의 불상을 만나볼 수 있었다. 사비 천도 후 백제의 불교문화는 절정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사지, 폐사지로 남아 미미한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정도만이 남아 아쉬운데, 그곳에서 발굴된 장인의 작품들, 절정에 이른 백제의 불교유물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제4전시실은 기증으로 빛난 문화재 사랑이라는 테마도 되어 있었다. 국립부여박물관이 개관한 1945년부터 현재까지 민병윤선생 등 50여 명의 기증자가 화살촉, 연꽃무늬수막새, 분청사기 연꽃물고기무늬병, 반닫이 등 820여 점의 유물을 기증하였다. 혼자서 소장하고 직계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공통의 재산으로 생각하고 이런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살맛이 난다. 생각보다 귀하고 중요해 보이는 유물이 많아서 보기 좋았다.
전시실 구경을 마치고 나오면서 메일 홀에서 다시 한번 사진을 남긴다. 안쪽이 넓고 공간배치를 잘 해 놓아서 박물관 같은 느낌이 아니다. 큰 호텔의 로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한쪽에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이 있었지만 굳이 기념품 샵까지 둘러 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기념품점은 통과했다.
박물관 내부 뿐만 아니라 박물관 야외에서는 보령 성주사터에서 가져온 성주사 비머리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유인원을 기린다고 신라 문무왕 3년에 세운 당 유인원 기비 등의 비석들이 비각 안에 있고, 석조불입상, 고려 때의 오층석탑 등을 볼 수 있었다. 안밖으로 전시를 잘 해놓았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면 시간이 있을 때마다 방문해 볼텐데, 박물관이 집에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어서 언제 다시 방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나면 다시 한번 부여를 방문하고 박물관도 다시 한번 방문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부여박물관에서 몇백m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정림사지 박물관과 정림사지를 방문했다. 차로는 2-3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부여에 있는 많은 유적들이 모두 근처에 집중되어 있어서 돌아보기에 무척 편하다. 정림사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정림사지를 주제로 백제의 불교문화를 재조명하기 위한 정림사지박물관이 있었다. 백제 사비시대에 이르러 절정을 이뤘던 불교문화의 중심이자 일본 고대 사찰의 효시를 이룬 정림사를 이해하기 위한 공간으로 다양한 백제의 불교문화는 물론 백제계의 석탑 등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백제계 석탑이란 백제의 영향을 받아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탑을 말힌다. 백제인들은 중국 남조의 목조탑 양식을 백제의 건축기술로 한단계 보완해 주변에 흔했던 화강암을 사용해 변하지 않는 석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감 석재의 각을 부드럽게 함으로써 석탑임에도 마치 목탑인 것처럼 부드럽게 표현했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오층석탑이 백제의 기술자들로 하여금 축조되어가는 과정과 함께 사비시대의 성왕이 그 건축현장을 둘러보는 모습이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다.
하지만 정림사지박물관을 대표하는 전시물은 1/12 크기로 재현한 정림사 복원 모형이다. 오층석탑이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는 정림사에 지금은 볼 수 없는 금당과 강당 건물이 일직선상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림사지 복원 모형 뒤로는 거대한 그림을 볼 수 있는데 이 그림은 사비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고지도다. 지금은 터만 남아, 남겨진 것이라고는 국보 제9호인 오층석탑과 보물 제108호인 석불좌상이 전부이지만 백제의 대표 사찰이었던 정림사의 모습을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정림사지박물관 바로 옆에 정림사지 터가 있다. 이곳에는 석불좌상과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남아 있는 곳이다. 백제 성왕이 538년에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과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여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했다. 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를 세웠다. 지금은 5층 석탑만 보이고 터만 남아 있어서 아쉬움이 크다. 최근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이곳 정림사지도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부여 시내의 중심부에 백제의 상징처럼 남아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의 건축물로는 현재 부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적이다. 오층석탑은 마치 나무를 깍듯이 돌을 다듬어 알맞은 비율로 쌓은 것이 특징으로 석탑임에도 불구하고 목탑과 같은 세련미와 조화미를 느낄 수 있다. 7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탑의 탑신에는 660년 8월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를 통해 이 석탑이 백제시대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정림사지에 있는 맞배지붕의 건축물은 백제에서 출토된 기와등을 참고해 복원해 놓은 건물이다. 건물안에 보물 제 108호로 지정된 석불좌성을 보호하기 위해 상당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부여에 있는 문화재여서 백제를 떠 올리지만, 정림사지 석불좌상은 고려 때의 제작된 것이다.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 곳에서 발견된 명문 기와를 통해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지금의 머리는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서 얹은 것이라고 한다. 많은 것을 배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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