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주택박물관 대학에서 고창지역의 역사와 문화 답사여행을 추진하게 되어서 박물관대학 수강생들과 함께 떠나게 되었다. 토지주택박물관 대학은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성남, 분당지역의 문화 활성화와 지역주민의 평생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지난 2000년도 만들어져, 13년째 운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회 교육프로그램이다. 매년 다양한 분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차별화된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고, 교육기간 12주 중에 한차례 국내 답사 여행을 다녀온다. 오늘 3곳의 지역을 정해 놓았는데, 그 중 한 곳인 고창지역으로 답사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오늘 일정은 고창 선운사와 고창읍성을 오전에 둘러 보고, 오후에는 고창 청보리밭과 고인돌공원을 둘러 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40여명의 수강생들과 함께 아침 7시 30분에 분당을 출발해서 고창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었다. 답사 여행이다 보니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문화해설사 선생님까지 모셔서 한층 더 유익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선운사였다.
선운산 자락에 자리 잡은 선운사는 고창을 대표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선운사로 들어 가는 길은 봄에는 벚꽃이,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에는 곱게 단풍으로 물들어 무척 아름답다고 한다. 계곡 양쪽으로 늘어선 오래된 나무들이 멋스럽게 터널을 만들어 놓았다.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선운사는 금동보살좌상 등 보물 5점과 천연기념물 등 지정문화재 19개가 남아 있다. 한창 번창하던 시절에는 89개 암자에 승려 3천여명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1년 내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절 입구쪽으로 들어가니 광장처럼 넓은 공간이 나오그 그 땅 가운데 선운사 일주문이 서 있다. 그런데 현판은 ‘도솔산선운사’로 돼 있다. 선운사의 뒷산은 선운산이지만 스님들 세계에선 도솔산으로 불리고 있어서다. 도솔(兜率)은 도솔천(兜率天)의 준말로 불교에서 ‘열반한 스님이 미래의 미륵불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하늘궁전’을 뜻한다고 함께한 선생님이 말하신다.
일주문을 지나 느티나무, 왕벚나무 등이 서 있는 편안한 흙길을 따라 걸어 들어 갔다. 길가 옆으로는 수량은 많지 않지만 사진을 찍으면 예술작품이 나올듯한 느낌의 도솔천이 흐르고 있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오른쪽 빽빽한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부도 밭이 지나고, 곧 선운사 천왕문이 나타났다. 느낌이 참 좋았던 길이었다.
선운사의 경내는 굉장히 넓다. 보통 절의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도록 지어졌다고 알고 있었는데, 선운사는 가로가 길고 깊이가 짧은 대지에 여러 건물을 지어 놓았다. 다만 절의 핵심공간인 대웅보전 앞에 만세루라고 하는, 누각이라기보다 그냥 마루가 넓은 강당을 하나 놓아 직접적인 접근을 막아 놓았다. 만세루는 평소에 선운사에서 방문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어 누구든 넓은 마루로 올라와 선운사 전통차를 무료로 즐길 수 있다고 하는데 어제가 석가탄신일(음력 4월 8일)이었는데 스님들과 봉사자들이 이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어 차를 마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만세루를 옆으로 비껴 들어가면 널찍한 정면 5간의 대웅보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만세루와 조금 어긋나게 마주보고 있다. 보물 제290호로 선운사의 본전으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데 조선 성종 3년(1472년)에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광해군 5년(1613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선운사의 주불전인 만큼 정면 5칸. 측면 3칸의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여 좌우 협시로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다. 원래는 5여래(아미타불, 석가모니불,비로자나불,노사나불,약사여래불)6보살(대세지,관음,문수,보현,일광,월광보살)을 한꺼번에 모신 선운사의 중심법당이었으나 정유재란때 피해를 입어 삼존불만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법당 앞에서 어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연등이 아직 자리잡고 있었다.
대웅전 뒤편에 일직선으로 늘어선 동백나무 군락지가 자리하고 있다. 동백은 따듯한 기후에서 자라는 꽃으로 우리나라의 남해안 일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쓰임새가 많다고 한다. 씨앗으로 기름을 짜고, 산불을 차단하는 방화림 역할도 했다. 이곳은 동백은 심은 시기가 정확치는 않으나 대략 2,000여 그루가 있다. 선운사의 동백숲은 충남 서천의 마량포구 동백숲과 더불어 자생지의 북한계선 식물로 가치가 높아 송악, 장사송과 함께 선운사 3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조금 일찍 왔으면 빨간 동백꽃을 보았을텐데, 시기적으로 조금 늦게 온 듯하다.
선운사는 절이 오래된 고찰로도 유명하지만 절을 감싸고 있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한 사찰이다, 봄에는 동백으로. 여름에는 신록으로. 초가을에는 상사화 군락. 늦가을에는 단풍으로... 대웅보전과 주변에 있는 관음전, 명부전, 영산전 등을 한 바퀴 빙 돌아보며 건물에 밴 오래된 시간의 역사를 느끼고, 여유로움을 즐겼다. 나즈막한 산아래 편안함을 느끼고 온 셈이다. 이곳 선운사에서는 휴식형 템플스테이와 산사 체험형 템플스테이를 하고 있다는데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심신의 안정과 건강을 도모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되어 있을 것 같았다.
대웅보전 앞마당 오른쪽에 위치한 선운사 육층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 석탑으로 원래는 9층 탑이었던 것이 현재는 6층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런데 9층이었던 탑이 6층만 남아 몸돌과 지붕돌을 맞추어 올렸다는데, 6층으로 쌓아진 현재의 탑의 비례와 모양은 아무리 보아도 별로 어색한 감이 없어 보였다. 탑 앞에 있는 설명문에는 방형의 축대안에 지대석을 세우고 각층에 사각형의 중석을 올렸다고 하면서 옥개석, 보개, 복말등 써 놓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만 잔뜩 써 놓았다. 보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답사여행을 온 우리에게 선운사의 백미는 성보박물관인 듯하다. 2006년에 개관하여 선운사가 보유하고 있는 성보문화재를 보관, 전시, 연구하는 불교전물 박물관이다. 지하 1층은 창고 지상 1층은 전시실과 학예실 사무실이 있고 지상 2층은 수장고로 쓰인다고 한다. 이곳에서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금동지장보살을 비롯해서 전북유형문화재인 벽파대선사비의 진품 등 선운사 소장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또한 관세음보살좌상과 탱화등 다수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어 볼거리가 많았다. 다만 실내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 사진을 찍지 않고 해설사님의 설명을 자세히 듣고 나왔다.
선운사 앞을 흘러내리는 도솔천. 잔잔한 흐름과 함께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다만 흐르는 물인데도 물속이 맑지가 않다. 바위나 자갈 등이 시커멓게 변해 있다. 가뭄 탓에 고인물이 썩었나 의심했는데, 친절하게도 안내 표지판이 있다. 떡갈나무를 비롯한 도토리나무 상수리나무 등에서 나오는 타닌 성분으로 인해 변한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물속을 굳이 들여다 보지 않은한 이 풍광은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단풍이 들었을 때는 더욱 멋지다고 하니 다음에 단풍철에 선운사를 한번 더 찾아야 할 듯하다. 교수님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짧은 시간에 선운사를 둘러 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에 다시 한번 더 찾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는 셈이다.
선운사 방문을 마치고 나서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고창읍성이다.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해 산자락 능선을 따라 튼튼한 돌로 쌓아올린 성으로,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였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불리는데, '모양'이라는 지명은 백제시대 이 고을 일대가 '모량부'라 불리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창읍성은 순천의 낙안읍성, 서산의 해미읍성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성곽이 온전히 잘 보전된 세 읍성 가운데 하나다. 낙안읍성은 현재도 그 성안에 마을이 있지만 해미와 고창 읍성을 그렇지 않다. 특히나 고창읍성은 성곽 안에 따로 마을이 조성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여지며, 주민들은 읍성 외곽에 거주하고 읍성 내부에는 관청과 관련된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읍성을 향하는 정문이 공북루이다. 보통 읍성의 주문이 남쪽으로 나 있는데 고창읍성의 정문은 북쪽에 있는데, 이는 고창읍성이 들어선 야산의 지형을 적절히 고려한 탓이다. 둘레 1,684m, 높이 4~6m, 동·서·북의 3문과 치(雉) 6곳, 옹성(甕城), 수구문(水口門) 2곳 등이 남아 있다. 고창읍성은 축성뒤에 한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아서 자연석으로 쌓은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개수 역시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을 보여 주는 곳이다.
공북루를 지나 성안으로 들어오면 오른편으로 관리사무소가 놓여 있고 왼편으로 감옥이 놓여 있다. 보통 감옥은 성 내부 깊숙이 있을것 같은데, 정문인 공북루 앞에 있는게 조금은 어색한듯한데, 실제 고증을 거쳐 복원했는지 의문이다. 당초 고창읍성 안에는 관아를 비롯해 22개 건물이 있었는데, 전란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훼손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고창읍성은 축성후 원형이 보전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성안의 건물들은 광복 이후에 복원된 건물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성안에는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지 않고 소나무를 비롯해서 각종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진 풍경이 시원스럽다. 소나무 숲 군데군데에는 기와를 머리에 인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당시 관아의 건물이었던 동헌과 작청, 관청, 객사, 누각 등이다. 오늘 답사여행이 고창읍성을 비롯해서 한두곳만 둘러보는 일정이었다면 천천히 읍성을 따라서 성곽 일주도 해 보았으면 좋았을텐데, 시간이 없어 성곽일주는 하지 못하고 성안에 있는 중요 건축물을 둘러 보는 것으로 정해졌다. 풍화루를 거쳐 오른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보니 내아가 나타난다. 조금 쉬운말로 하면 안채, 고을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이다.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 군. 현 등 각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동헌이라고 한다. 고창읍성의 동헌 건물 정면에는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의 평근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동헌과 내아는 바로 붙어 있었는데 집에서 직무실까지의 출근 거리가 1분도 되지 않은 듯하다. 보통 다른 지역의 성을 보면 성안 중심지에 동헌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창의 동헌은 이렇게 중심지가 아닌 숲속에 자리잡고 있어, 그간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이 하나의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싶다.
관청 건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객사를 찾아 보았다. 각 고을마다 있는 객사는 가운데 정당을 두어 임금의 궐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달 두 번 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양편의 익실은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모양지관'이라는 현판을 내건 고창객사는 여느 객사 건물과 동일한 건축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 고창객사도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8년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1991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건축물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 볼 때 고창객사가 여름에는 시원했을 것 같은 건물이지만 추운 겨울쳘에 어떻게 생활했을지가 의문이다. 불 때는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화해설사님의 성안 건물에 대한 설명이 끝나서 나서 약간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그 시간을 활용해서 성곽을 올라 성을 한바퀴 돌아볼 여건의 되지 않았다. 성 내부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공북루 옆에 보니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이란 표지판이 있고 바로 옆 표지판에는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성벽에 올라서니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가 유난히 희게 보이는데, 트레킹 코스로 걷기 좋은 평탄한 길이고 주변 경관도 아름답다. 성곽을 따라 걷기 좋은 흙길이 깔려 있고, 중간 중간에 정자도 자리 잡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고창읍성길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가족과 꼭 함께 와서 읍성을 따라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성내에는 1871년에 세운 흥선대원군 척화비도 있었다. 전면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의 열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서양의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고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행위다. 신미양요 이후 설치된 척화비는 정부의 개화정책 이후 거의가 철거되었지만, 함양 상림의 척화비와 더불어 몇 기가 이렇게 온전히 남아있기도 하다. 개국을 하지 않아 외국의 문물을 늦게 받아들이고 외침을 받은 점도 있지만, 그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싶었다. 고창읍성 앞에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가인 신재효의 생가가 있어 방문해 보기로 한다. 성 밖에서 바로보는 고창읍성의 모습이 들어갈 때보다 더 멋져 보이는 것은 성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를 더 많이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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