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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성 방문 (2013.1.2)

남녘하늘 2014. 7. 24. 21:56

 

 새해를 맞아 온 가족에 수원성을 방문했다. 분당에서 살다가 광교로 이사를 와서 수원시민이 된지 몇 달이 되었는데 가까이 있지만 그동안 가보지 못한 수원성을 정초에 한번 둘러 보아야 겠다는 생각에서 수원성을 찾았다. 수원성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인데, 그동안 차를 타고 지나치기는 했어도 마음먹고 방문해 보지 못했었다. 연말에 내린 눈이 연초에도 녹지 않아서 온통 흰색으로 덮혀 있는 수원성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다보니 일찍부터 성곽문화가 발달했다. 성곽의 조성은 주로 험한 산세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나, 한양 도성처럼 시내 중심에 위치한 곳도 일부 있다. 수원성은 수원 시내 중심에 위치한 것으로 다른 어느 성곽보다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 성곽중 뛰어난 건축물이다. 더구나 수원성은 정조시대의 역사·문화, 정조의 효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조 때 축조된 건물로 오래된 문화유산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대부분의 성곽은 현대에 와서 복원된 것이다. 자연적인 풍화 작용으로 무너진 성벽이 있고, 일제 강점기 때의 대홍수로 유실이 되었으며, 특히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인하여 구조물의 상당수가 파괴되어 버렸다.

 

 성곽의 상당 구간이 복원된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수원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수원성에 대한 건축 기록인 '화성성역의궤'  때문이다. 구간별로 성벽을 쌓을 때 이용된 석재의 크기와 형상, 숫자는 물론이거니와 나무 대문을 만들 때사용한 못의 갯수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화성성역의궤로 인하여 수원성을 원형 그대로 복원할 수 있었고, 유네스코에서도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화성이 다시 한번 부서지더라도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100%의 완벽한 복원이 가능하다. 전통 시대 건축물에 대해 이정도까지 자세한 기록을 남긴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화성성격의궤를 포함하여 현존하는 조선 시대의 모든 의궤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수원성은 4대문을 중심으로 암문(暗門) 4개, 수문(水門) 2개, 적대(敵臺) 4개, 공심돈(空心墩) 3개, 봉돈(烽墩) 1개, 포루(砲樓) 5개, 장대(將臺) 2개, 각루(角樓) 4개, 포루(飽樓) 5개 등 다양한 구조물을 치밀하고 규모 있게 배치하였으며, 성내에는 행궁(行宮)을 마련해 임금이 머물 수 있는 제반 시설도 갖추었다. 우리 가족은 창룡문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수원성 답사를 시작하였다. 수원성에는 북쪽에 장안문(長安門), 남쪽에 팔달문(八達門), 동쪽에 창룡문(蒼龍門), 서쪽에 화서문(華西門) 등의 사대문이 있다. 이 중 수원성을 대표하는 성문이 장안문과 팔달문이다. 규모도 크거니와 무지개 모양의 홍예 위의 누(樓)가 2층의 높직한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화려하고 장중하다.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아담한 단층으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창룡문 주차장에서 창룡문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활궁터(국궁 체험장)와 동북공심대가 보인다. 국궁체험장은 일번인들도 사용료를 지불하고 쏠 수 있다고 하는데 겨울철에는 개방을 하지 않는듯하다. 수원성을 한번 와 봐야겠다는 생각에 연초에 찾았지만 수원성은 오늘 같은 겨울부다는 잔디가 파릇파릇하고 초록의 풍경을 즐길 수 있을 때가 좋은 듯하다.

 

수원성의 축성은 정조때 이루어졌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복권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실천한다. 이 과정에서 정조는 수원을 주목하고 이곳을 그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자 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이곳에 행궁을 설치하고 성곽을 축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수원성은 계획도시의 성격을 지니다. 정조 18년(1794년) 2월에 시작하여 2년 6개월 만에 완공을 이룬 수원성은 당대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기술을 집약시켜 만든 것이었다. 화성성역(華城城役)으로 불리는 수원성 축조사업은 남인의 영수이자 정조 개혁정치의 참모였던 채제공이 총 지휘를 맡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산 정약용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감독했다. 특히 정약용의 유명한 발명품인 활차와 거중기가 매우 쓸모 있게 사용됐음은 너무나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창룡문을 지나면 사방이 담장에 둘러싸인 정면 5칸인 기와집이 나오는데, 이곳은 수원성 동쪽 군사들을 지휘하던 훈련장으로 연무대 또는 동장대(東將臺)라고 한다. 담장에 둘러싸여 사람들의 왕래가 상대적으로 적은 곳이지만, 의젓한 외모와 넓은 구조가 연무대의 특징을 잘 살려주고 있다. 수원성을 복원하면서 이곳에 있는 가옥을 많이 매입해서 공원과 주차장 등으로 만들었다. 옛날 지나치면서 봤던 수원성이 아니였다.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해서 많은 투자를 해 놓은 듯 한데, 이 정도라면 외국인들도 광광차 와서 보더라도 볼거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동장대에서 성곽을 따라 장안문 방향으로 내려 오면 수원성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곳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 나온다. 방화수류정은 화홍문 동쪽 높은 벼랑 위에 세워져 있다. 동북각루라고도 불리는 이 정자는 그 모양이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자와는 다른 매우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방화수류라는 이름은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인 정명도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꽃을 찾고 버드나무 따라 지나간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자연의 풍류를 찾으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도 이곳을 찾아와 관람하고 있어 큰 녀석이 한참동안 수원성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방화수류정 바로 아랫쪽에는 화홍문(華虹門)이 있다. 화홍문이라고 해서 성문의 하나로 사용하는 문인줄 알았더니 성안을 지나는 수원천 위에 세워진 다리 역할을 하는 수문이다. 물길이 지나갈 수 있도록 7칸의 홍예다리가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세워 놓았다. 화홍문은 바로 옆의 방화수류정과 어울려 멋진 풍광을 만들어주고 있다. 겨울철이라 물이 거의 흐르지 않았지만 물이 흐르고 초록이 가득찼을 때 왔다며 더욱 멋있었을 것 같다. 주변에 둥그런 모양의 자그마한 저수지인 용연지도 있었는데 정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바라보면 주변의 경치가 멋있어 보인다. 과거의 수원성과는 다르게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참 잘 가꾸어 놓았다는 생각이다. 옛날에는 이 근처에도 모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곳으로 알고 있는데.  

 

 

 

 

 

 


수원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을 출발하여 5.7㎞ 정도의 수원성 성곽길을 모두 걸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출발을 했는데 눈이 내려 미끄러운 성곽을 오르 내리는 것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고, 또 날씨가 생각보다는 추워서 성곽 전체를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랐다. 생각을 바꾸어 오늘의 목표는 수원성의 북문인 장안문으로 수정했다. 대신 성곽을 따라서 걷지않고 편한 길을 따라서 성 안팎을 두루 살펴 보았다. 성곽 전체를 돌아 보는 것은 날씨가 따뜻해지면 다시 도전해 보기로 과제로 남겨 두었다. 어짜피 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원성의 바깥쪽도 상당히 정비를 많이 했다는 느낌이다. 참으로 마음에 든다.   

 

 

 

 

 

 

 오늘 수원성 산책의 종착점인 장안문에 도착했다. 수원성을 출입하는 4대문은 북쪽에 장안문(長安門), 남쪽에 팔달문(八達門), 동쪽에 창룡문(蒼龍門), 서쪽에 화서문(華西門)이다. 그 중 수원성을 대표하는 성문이 장안문과 팔달문이다. 장안문은 석축으로 된 무지개문 2층에 문루가 세워져 있고 벽돌로 쌓은 반월형 옹성이 문을 둘러 싸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장안문 역시 6.25전쟁 때 문루가 소실되었으나 화성 성역의궤에 의거 1978년 복원되었다. 언젠가 마라톤 대회를 하면서 이 문을 뛰어서 지나쳤 보기도 했었는데... 수원성의 남은 구간은 멀지 않은 시기에 다시 한번 방문해서 모두 돌아볼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생각만 앞서고 미리 준비하지 못하면 오늘처럼 중간에 포기하게 되는 법이다. 오후의 날씨가 생각보다는 많이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