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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산, 장곡사, 현충사 방문 (2014.3.1)

남녘하늘 2016. 3. 29. 00:23


 매년 신년 초에 청양에 있는 이장님 댁을 방문하고 했는데 올해는 3.1절을 맞이해 방문하게 되었다. 이장님께서 년초에 사랑나누기회 회원을 비롯해서 몇 사람을 청양에 있는 고향집에 초대해서 식사와 함께 집 뒤에 있는 망월산(356m)에 올라 시산제를 올리곤 했는데, 금년에은 시산제를 3월에 하게 되었다. 망월산은 청양군 장평면에 위치하고 청양에서는 칠갑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지만 높은 산이 없는 충남의 산인지라 나즈막한 산이다. 연초에 오른던 망월산을 3월에 오르니 눈도 보이지 않고 봄 같은 느낌이다.  

 

 올해는 참가 인원이 조금 더 늘었다. 이 행사에 참석하고 싶은 사람이 더 많아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 자리에 얼굴을 알리고 싶은 사람도 많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꾸준하게 이장님의 지위에 상관없이 참석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속담에 '정승집 개 죽은 데는 문상을 가도 정승 죽으면 문상을 가지 않는다'는 것처럼 눈앞에서 얼쩡거리려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오늘 시산제를 시작한다.    



 

 

 

 1월달에 시산제를 할 때는 날씨가 제법 추웠는데 3월의 시산제는 날씨가 포근해서 모두 여유가 있다. 간단한 상을 준비해 놓고도 여유있는 진행이 되었다. 함께 버스를 타고 온 회원 이외에도 개별 출발해서 온 회원까지 함께 하니 상당한 인원이 모였다. 이장님의 지위가 올라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속성이 그러한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오늘 모인 사람들이 다음에도 변함없이 모임에도 나오고, 행사에도 참여하기를 바라지만 그 또한 변함없기를 바라는 것이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시산제 행사에서 절을 하는 것에 대해 특정 종교에 따른 의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올 한해도 무탈하고 잘 되기를 바란다는 행사라고 편하게 생각하면 된다. 그마져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맞지 않다면 그냥 참가만 해도 된다. 최근 친구중에 한명이 늦은 나이에 한 종교에 심취하더니 나에게 전도하려고 해서 불편하다. 그 종교에서는 전도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일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강요하는 것은 불편하다. 종교에 심취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의 가면을 쓰고 나쁜 짖을 일삼는 것보다, 선하게 생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 시산제에도 누구도 강권이 의하지 않고 잘 진행되었다. 

 

 


 

 

 시산제를 지내고 이장님과 함께 찍은 사진. 시산제를 하면서 태극기를 챙기고 갈만큼 역사의식과 국가관이 투철하신 이장님이다. 나도 태극기를 좋아하지만 이런 행사때까지 챙기지는 못하고, 가끔 해외마라톤을 갈 때는 챙겨서 가기도 한다. 외국에 나가보면 저절로 애국심이 생긴다. 평소에는 그럴 기회도 없고, 남보기에 조금 쑥스럽기도 하다. 

 

 

 

 시산제를 마치고 이장님 댁으로 가는 길에 오늘은 관광버스가 있어서 잠시 장곡사에 들렀다. 장곡사는 이장님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절인데 이 절에서 이장님이 공부도 했었고 이 절의 주지승과도 상당한 인연이 있다고 한다. 나도 장곡사는 칠갑산 산행을 왔을 때 두어번 와 보았던 사찰이기도 해서 초행은 아니었다. 칠갑산 남쪽 기슭에 있는 장곡사(長谷寺)는 850년 통일신라 문성왕 때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창건한 천년고찰 이다. 장곡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본존불을 모신 대웅전이 2개인 절이다. 상대웅전은 신라, 하대웅전은 조선 중기 때 각각 지어진 것으로 각기 다른 시대의 건축 양식을 띤 대웅전이 한 사찰에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 






 절에는 국보 58호인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등 2개의 국보와 보물 162호, 181호인 상하대웅전 등 4개의 보물이 있다. 유형문화재 151호 설선당 등 전국적으로 보기 드물게 많은 문화재를 갖고 있다. 그리고 절마다 한두 개쯤은 솟아 있는 탑이 전혀 없다는 것도 장곡사의 특징이다. 

두 개의 대웅전이 동남향과 서남향으로 좌향만을 달리한 채 비탈길 위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위쪽은 상대웅전, 아래쪽은 하대웅전이라 불린다. 이곳 실정에 밝으신 이장님이 일행들에게 장곡사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진에 보이는 장곡사 현판은 김종필 전 총리가 쓴 것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도 알려주는 사이에 주지스님까지 나와서 우리 일행을 맞아 주었다.    






 이장님의 설명을 한참 듣고 나서 장곡사를 둘러 보는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이미 두어번 와 보았고, 관심이 있었던 절이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일행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왔기에 함께 돌아다녔다. 큰 사찰은 아니지만 조용한 산사가 참 마음에 드는 곳이다. 가끔 이런 절에 앉아서 명상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데, 실행하기가 참 어렵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하고 지나는 것이 너무 많다.    





 다시 윗쪽으로 올라 상대웅전으로 이동했다. 보물 제162호인 상대웅전은 맞배지붕 구조에 전면 3칸 측면 2칸인 점은 아래의 하대웅전과 유사하나 하대웅전이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에 반해 이 상대웅전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하나 아주 특이한 점은 건물 안쪽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그 중에는 통일신라 때 것으로 보이는 잎이 8개인 연꽃무늬를 새긴 것도 섞여 있다고 한다. 오늘도 휴일이서인지 칠갑산 산행을 왔다가 장곡사에 들린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장곡사(長谷寺)는 850년(통일신라 문성왕 12년)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창건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아직 봄이 되지 않아서 나무에 잎이 없어 썰렁한 겨울의 분위기이지만 장곡사는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의 사찰이었다. 대웅전이 두개 있다는 것 이외에도 하대웅전 내부를 보면 보물  제337호인 금동약사여래좌상(金銅藥師如來坐像)이 홀로 모셔져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통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함께 모시는 경우가 많은데 대웅전에 약사여래상을 홀로 모신 경우는 오직 이곳 장곡사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특이한 광경이다. 오늘 장곡사를 온 것은 이장님 댁 근처에 유명한 절이 있으니 소개를 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덕분에 다시 장곡사를 보게 되었다.  




 

 

 망월산 시산제와 장곡사 구경을  마치고 이장님 댁으로 돌아와서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이장님 집을 지켜 주고 있는 분들이 식사준비를 해 주셨는데 너무 많은 것을 준비해 주셔서 잘 먹었다. 이장님 댁으로 들어가기 앞서 장평면 분향1리 마을 입구에는 풍천 임씨 재실을 알리는 표시석이 크게 세워져 있었다. 대형 버스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표시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장 찍고 걸어 들어간다. 언제 방문해도 항상 반갑게 맞아 주는 분들이 있어 좋다.    






 오늘도 이장님 댁을 방문한 사람을 위해서 푸짐한 음식이 준비되었다. 오늘은 관광버스로 함께 이동해 왔기 때문에 서울로 돌아갈 때 운전을 해야 할 부담이 없어 더 즐거운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그냥 산에만 갔다 와서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중간에 장곡사까지 갔다 오는 바람에 식사 시간이 늦어져서 맛있는 음식을 더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 오는 길에 아산에 있는 현충사를 잠시 방문했다. 3.1절이어서 일부러 이장님께서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전에 연락을 취해 놓았는지 현충사에 근무하는 직원이 안내를 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화재 관람은 해설사의 설명을 들도 보는 것과 그냥 지나치면서 보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잘 모른채 넘어갈 수 있는 내용도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나도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몇번 현충사를 방문했었지만 오랫만에 방문한 현충사는 이전보다 한결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입구에 이순신장군 기념관도 새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너무 늦게 도착한지라 기념관 관람은 생략한채 안내를 받으면 현충사를 돌아보게 된다. 





 이순신장군의 기념관은 잔디를 입힌 언덕 모양의 두 건물(사무동과 교육관) 속에 흙벽을 입힌 전시동이 안겨있는 형상이다. 현충사 준경내 지역에 들어오면서 기존의 경관을 거슬리지 않게, 자연 지세를 최대한 살린것이 너무도 좋다. 관람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서 한번 돌아보지 못했는데 다음에 다시 방문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기념관을 지나 바로 현충사로 향한다. 








 현충사 내부는 조경에도 상당히 신경을 써 놓았는데 잔디 곳곳을 태운 흔적이 있었다. 잔디를 태운 이유를 물어보니 잔디는 더 잘 자라고 잡초는 자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화재의 위험도 있고 태우고 난 다음 보기도 별로이지만, 그래야 다음 잔디가 더 많이 잘 자란다는 설명이다. 잔디를 태우기 전에 물뿌리개로 불길이 닿으면 안되는 곳에 충분히 물을 뿌려 주는 등 화재 예방을 위한 잔디를 태우는 상당한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한다. 하여간 시커멎게 보기는 좋지 않았지만 더 좋은 잔디를 위한 노력으로 봐 주어야 할 듯하다.   






 현충사는 1706년 숙종 임금 때 건립되었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어 유허비만 남긴채 사라지는 운명이 되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때 국민들이 모은 성금으로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하게 된다. 이후 이순신장군을 존경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지시로 1967년에 순한국식 콘크리트 구조로 된 현재의 현충사로 세워졌고, 기존의 건물은 서편 참배로 옆으로 이전하여 ‘구 현충사’라 부른다. 현충사 앞에서 참배를 하고 난생 처음으로 현충사 내부에 들어가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내부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함께 장군의 일생 중에 특기할 만한 사건 10가지를 묘사한 십경도라는 그림이 있었다. 






 현충사의 참배가 중요한 일이어서 참배부터 마치고 나서 되돌아 나오는 길에 현충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충무공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세째아들인 이면공의 묘소도 있다. 이면은 어려서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해 충무공이 극진히 사랑하던 아들이었고 21세에 마을에 침입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바로 옆쪽으로는 충무공이 활을 쏘며 무예를 연마하던 활터도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금님이 북쪽에 계시기 때문에 항상 남쪽을 향해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해설하는 분의 설명을 함께 들으니 짧은 시간에 잘 알지 못했던 여러가지 내용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3.1절을 맞아 현충사까지 방문하니 하루에 참 많은 일을 했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