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지리산 통제가 열리던 날 1박 2일 일정으로 지리산 눈꽃 산행을 다녀왔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새벽 0시에 출발한 고속버스는 4시가 되어서야 백무동에 도착하였다. 이번 산행 일정은 백무동을 출발해서 장터목으로 올라, 이번에는 천왕봉은 가지 않고 세석을 지나 벽소령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다음날 한신계곡을 지나 다시 백무동으로 오는 일정을 잡았다.
지리산. 산세가 수려하거나, 웅장하거나, 장엄하다는 혹은 그 흔한 명산이라는 표현으로도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산이다. 한량없는 넓이와 깊이를 가진 산이어서 늘 경건한 마음으로 산에 오른다. 새벽 4시 아직 사방이 컴컴한 상태에서 국립공원 지킴이가 입산을 허가해 준다. 오늘 산행은 허병녕선배님 부부, 이장호선배님 부부, 장상오씨 부부, 전재금형수님. 이혜준선배님등 9명이 함께 했다. 어제부터 눈이 많이 내려서 세석에서 벽소령으로 가는 길이 아직 막혀 있을 것이라고 귀띔을 해 준다. 일단 세석대피소까지 가서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기로 하고 출발한다.
백무동 탐방지원센터를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갈림길 이정표가 장터목대피소 5.8km, 세석대피소 6.5km를 가리킨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왼쪽 장터목대피소 방향이다. 사방이 온통 눈으로 덥혀 있는데 너무 어두워서 어둠이 걷치기 시작하는 7시까지 3시간동안에는 묵묵히 걸어 올라가기만 한다. 밝은 대낮이었으면 무척 힘들게 느꼈겠지만 앞사람만 따라서 오르다보니 어느덧 장터목대피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부지런히 걸었고, 함께 온 사람들도 모두 강철 체력이다.
주변이 밝아오면서 주변도 살펴보면서 사진도 찍기 시작한다. 보이는 등산로에는 온통 눈이다. 최근 어느 산에 가서도 보지 못한 규모로 장관이다. 장터목대피소 가까이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는데, 날이 밝으니 힘도 들고 주변을 돌아보느리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체된다. 고도를 높일수록 쌓인 눈의 깊이도 더해 어떤 곳은 허리를 훌쩍 넘는다. 그나마 우리보다 앞서 간 사람들이 발자국이 남아 있어서 길을 헤매지 않고 큰 어려움없이 따라갈 수 있다.
장터목대피소까지는 그리 힘들게 올랐다는 느낌은 없었다. 장터목에 오르니 바람이 워낙 심하게 불어서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지경이다. 장터목대피소에서 오늘 세석에서 벽소령가는 능선길은 눈때문에 폐쇄가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준다. 아침 일찍 벌써 장터목대피소까지 올라 왔는데 벽소령까지 가지 않으면 시간이 너무 많이 남게 된다. 천왕봉 가는 길은 통제가 되지 않아서 갔다 올 수 있다고 하는데 바람이 너무나 거세서 갔다 올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결국 장터목에서 아침 식사를 여유 있게 마치고 천천히 세석대피소로 출발한다.
장터목에서 세석으로 향하는 능선길은 환상적이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능선길이어서 장터목으로 올라 올때만큼 힘이 들지는 않는다. 자연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훨씬 더 많아졌다. 가는 길 곳곳에 핀 눈꽃들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아름답고 화사하게 느껴진다. 멋진 풍광과 상관없이 바람은 계속 거세다. 겨울 산행은 무엇보다 체온의 유지가 관건이기 때문에 두꺼운 옷을 한 벌 입는 것보다 여러 벌의 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며 상황에 맞게 체온 조절해 나갔다. 북풍이 불어서 북쪽에서 바람이 부는 쪽은 한겨울이고, 북품을 막아주는 곳은 따스한 봄날같은 느낌. 같은 산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난다.
연하봉을 넘어 촛대봉으로 향하는 주능선은 설경 그 자체였다. 능선을 타고 나아갈 때마다 시시각각 변모하는 지리산의 풍광은 숨을 멎게 만든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나뭇가지마다 피어나는 눈꽃은 감탄을 자아낸다. 이따금씩 머리에, 배낭에, 옷에 쌓인 눈을 털어내기 바쁘지만 설경 속을 걷는 발걸음은 가볍고, 얼굴에 웃음꽃이 피게 하는 마음은 더욱 가볍다. 역시 여행은 누구와 함께 하는지가 중요하다.
눈꽃터널을 지나 이윽고 광활한 세석평원에 올라선다. 눈앞에 펼쳐진 저 지리산의 설국!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오늘은 눈이 내리는 날이 아닌데 바람이 워낙 거세게 불어서 쌓인 눈이 날려서 눈이 내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더구나 눈이 날려서 앞사람들이 지난간 흔적을 거의 없애버려서 일부 구간에서는 거의 러셀 수준으로 진행을 해야했다. 평소보다 두배의 힘이 드는 눈길을 걷고 강풍과 눈보라로 인해 체력고갈은 훨씬 더 빨리 오는 듯하다. 그나마 밝은 대낮이고 능선길이어서 길을 찾아 헤메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장터목과 세석대피소 사이에는 연하봉과 촛대봉이 비교적 높은 봉우리다. 세석대피소에서 700여m 떨어진 촛대봉은 고도 1703.7m로 세석에서 잠을 잘 경우에 이 봉우리에서 일출을 봐야한다. 촛대봉은 흙이 다 쓸려 내려가 암봉이 남아 있는 봉우리로 동쪽으로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을 바라보고 반대쪽 서쪽으로는 지리산 2봉인 반야봉과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주능이 조망되는 아름다운 장소이다. 그런데 오늘은 촛대봉이 바람과 눈에 얼어 붙어 있어 앙상한 느낌이다. 찬바람이 너무 세어서 잠시 머물러 있기에도 힘이 들다. 이제 촛대봉만 넘어가면 세석대피소가 나온다.
세석대피소에 도착했다.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점심을 먹고 벽소령대피소로 가야 하는데, 등산로에 허리까지 쌓인 눈 때문에 대피소에서 더 이상 갈 수가 없다고 한다. 우리는 벽소령대피소에 숙박을 예약을 해 놓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지리산 주능선 세석평원에 자리 잡은 세석 대피소는 수용인원 190명으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라고 한다. 시설도 꽤 잘 되어 있어 하루 숙박을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오늘 이곳에서 잘 수 없다면 점심을 먹고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대피소에서 가장 따뜻한 장소인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해 준다. 대피소 앞에는 입산시간지정제 안내 표시가 붙어 있었다. 벽소령대피소 예약자에 한해서 3시까지 통과할 수 있다는데 오늘 길이 막혀서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는다. 식사를 하면서 대피소에 확인을 하니 벽소령 대피소에서 이쪽 방향으로 넘어와서 잠을 자기로 예약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넘어오지 못하는 바람에 오늘 세석대피소에서 잘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잠을 잘 시간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무겁게 메고 왔던 짐을 대피소에 풀어 놓고 잠시 휴식을 취해 주었다. 눈꽃에 취해서 오느라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따뜻한 음식을 먹고 따스한 곳에 있으니 피곤함이 몰려 왔다. 더구나 밤새 심야버스를 타고 왔고, 새벽 4시부터 강행군을 했기 때문에 피곤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듯하다. 잠시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깜박 잠이 들어 곤하게 1시간 넘게 잠을 잤다. 하지만 대피소에서 잠만 자기에는 아까운 시간이라 다시 밖으로 나와보니 구름이 거치고 있다. 대피소 주변의 눈꽃도 장관이다.
대피소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니 해가 저물어 간다. 석양에 비친 눈 꽃의 또 다른 맛이다. 우리보다 일찍 도착해서 세석대피소로 넘어가 보겠다고 객기를 부렸던 사람들이 얼은 동태가 되어서 되돌아왔다.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정도의 눈이 쌓여 있다고 한다. 레셀을 하느라 체력이 완전 고갈되어서 되돌아 왔다. 우리 일행도 무리를 햇으면 큰일 날뻔 했다.
세석대피소는 가운데 중앙 홀을 중심으로 1층에는 매점과 1호실이 배치되어 있고,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2호실과 3호실이 차례로 나타난다. 1호실엔 여성탐방객이 묵고 2,3호실엔 남성탐방객이 묵는다. 대피소 규모와 시설은 좋지만 한 사람당 배정된 침상의 폭이 너무 좁은 것이 흠이다. ㅡ런데 오늘 벽소령쪽에서 넘어오기로 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좁은 침상에서 잠을 잘 줄 알았더니 오히려 넉넉한 잠자리가 되었다. 넘어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눈때문에 대피소 예약을 취소한 등산객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밤새 별빛 초롱초롱 맑던 하늘은 아침에 일어나니 다시 흐려지면서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산을 올라가는 것이 아니어서 눈이 내려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하는데 식당에 가보니 다른 팀들도 모두 부지런하다. 가는 방향은 다르지만 아침 일찍 출발하려는 모양이다. 간단하지 않은 아침식사를 함께 한다. 아침만 먹고 나면 더 이상 산에서 식사는 없는데 함께한 동료들이 먹을 것을 많이 준비해온 덕분에 먹을 것을 모두 먹지 못하고 다시 가지고 가게된다.
이른 아침 출발에는 눈이 조금 내리기 시작한다. 이번 산행에는 눈을 원없게 보게 해줄 모양이다. 어짜피 벽소령대피소 방향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일찌감히 한신계곡으로 내려가서 서울로 여유있게 돌아 가기로 했다. 올라가는 길보다는 내려가는 길이 더 위험할 수 있기에 여유있게 내려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어제 장터목으로 올라올 때는 어둠속에서 앞사람 랜턴 불빛만 쳐다보고 올라 왔지만 오늘 내려가는 길에는 천천히 걸으며 자연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마음 속에 새겨 두며 걷기로 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정호승시인, '수선화에게'에서 일부인용) 시어처럼 아침부터 눈 속을 걷기 시작한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외롭다. 눈보라가 치는 길 위를 혼자 걷는 것처럼. 하지만 오늘은 함께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다.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 했지만 눈덮힌 지리산에서는 그 외로움조차 아름다움으로 채색된다. 너무 고상한 표현을 했나?
한신계곡으로 내려오는 초반에는 경사가 급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르륵 미끄러지기 일쑤다. 이건 마치 푹신한 솜이불의 비단보를 밟는 것처럼 미끄럽다는 느낌이다. 이럴 때에는 아이젠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혹시 넘어지더라도 앞서가는 사람한테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앞 뒤 간격을 충분히 벌려 주어야 한다. 이런 겨울 산행은 항상 악천후에 대비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고 어떤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혼자보다는 두명 이상이 산행을 해야 한다. 올라갈 때 보다 더 땀이 흐르는 것 같다.
한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지는 한신계곡은 송두리째 얼어붙어 아예 물이 없는 계곡처럼 보였고, 주변은 온통 눈으로 뒤덮혀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아랫쪽을 향해 내려가니 점점 백무동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껴질 뿐이다. 우리 일행이 일찍 출발해서인지 산을 내려가는 사람도, 또 올라 오는 사람도 만나지 못해 한신계곡을 우리가 독차지한 것 같다. 몸은 힘들고 숨은 거칠었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고 투명한 느낌이 드는 산행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백무동에 도착할때까지 꾸준하게 내렸다. 한신계곡은 깊고 넓은 계곡이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게 하는 계곡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도 하고, 계곡의 물이 차고 험하며 굽이치는 곳이 많아 한산하다고 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이름의 유래야 어찌되었던 한신계곡은 지리산 계곡 가운데 가장 수려한 곳으로 꼽힌다. 세석에서 발원한 본류가 백무동까지 굽이쳐 흘러내리며 만들어낸 수많은 폭포와 소(沼) 때문이다. 하지만 눈이 가득한 한신계곡은 어디가 계곡이고 폭포인지 구릉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냥 눈밭일 뿐이다.
백무동까지 500m 간격으로 안내돼있는 계곡 안내 번호 표지판을 보고서 남은 거리를 가늠하게 된다. 11번을 기준으로 11-1, 11-2, 11-3 순으로 되어 있느데 11번 표시는 한신계곡을 나타낸다. 내려 오는 동안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몇번이고 넘게 된다. 계곡에 푸르름이 남아 있을 때에는 다리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대단하지만, 오늘은 어느 다리를 건너든간에 똑같은 풍경이다.
세석대피소에서 출발한지 3시간 30분 정도 걸려서 드디어 백무동 입구에 도착했다. 눈이 많이 내려서 내려 오는 길도 그리 쉽게 온 것 같지 않다. 모자가 축축하다고 느낄 정도로 땀도 많이 흘렸다. 함께 한 일행 모두가 산행중에 아무런 문제 없이 내려 왔음에 감사한 마음이다.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니 한신폭포, 오층폭포, 가내소폭포, 첫나들이폭포가 표시 되어 있었는데 어디인지도 모르고 지나쳤다. 백무동 버스 정류정애 내려 오니 함양으로 가는 버스가 바로 있어 맛있는 점심을 먹으로 바로 함양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함양에서 식사를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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