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일본 대마도 ('07.4)

대마도 여행 2-2 (2007.4)

남녘하늘 2008. 8. 21. 09:34

 

 

 

아침 일찍 일어나 이즈하라(嚴原) 시내를 산책하면서 방문한 이즈하라(嚴原)소학교를 배경으로. 

 

 

 

 

이즈하라(嚴原)는 쓰시마(對馬島)에서는 가장 큰 도시이지만 걸어서 10-20분이면 시내 전체를 모두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다만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장소들과 유적들 몇몇이 있고 이것을 관광 상품화하여 한국인들을 불러오으고 있는 것이다. 가이드를 따라 다니면 이름있는 몇몇 관광지만을 둘러본게되고 정작 관심있는 일반인들의 생활이나 사는 모습을 둘러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이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 이즈하라(嚴原)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한국 관광객은 거의 모두 가보지 못했을 몇몇 장소를 다녔고 그 중 하나가 이즈하라(嚴原) 소학교이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학교가 참으로 아담하고 정겨웠다.  

 

 

  

 

  

 

 

이즈하라(嚴原)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이다.  도심을 통과하는 조그마한 하천임에도 물도 깨끗하고 물고기가  살고 있으며 하천을 따라서 조선통신사 행렬도의 타일도 붙여져 있었다. 시내 중심을 가로질러 바로 앞의 이즈하라 항을 통해 바다로 빠져나가는데, 하천 주변과 다리를 잘 가꾸어 놓아 제법 인상적인 모습이다.  하천을 중심으로 양 옆에 비좁은 차도가 나 있고, 도로를 따라 길게 상권이 형성되어 있으며, 상가 건물 뒤편으로는 좁디좁은 골목에 전통가옥이 빽빽이 들어찬  전형적인 일본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이즈하라(嚴原)시내 개천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모자이크한 타일. 개천을 따라서 꽤 많은 행렬도 타일이 설치되어 있다. 

 

 

 

 

 

이즈하라(嚴原)는 쓰시마 남섬의 중간쯤에 있으며 일본 본토를 바라보고 있는 쓰시마 전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일본 본섬과의 직선거리도 가장 가까운 지역이고 조선의 통신사들이 일본 본섬을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장소들과 유적들 몇몇이 남아있어 옛날의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쓰시마에서 가장 번화하다고는 하지만 걸어서 20여분이면 모든 시내구경을 다할 수 있을 정도이다. 사진의 잘 쌓아놓은 담들도 조선통신사를 위해 만들어 놓은 담의 일부이다.  

 

 

 

 

지유젠지(修善寺)는 이즈하라(嚴原)에서도 아주 조그마한 절이다. 다만 이 사찰도  백제의 스님이 건너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는 등 우리나라와의 관련성이 적잖게 있다. 하지만 이 절이 한국사람들에게 유명하고 관광코스에 꼭 포함되는 이유는  구한말 선비이자 항일의병장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순국비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최익현선생이 쓰시마(對馬島)로 유배와서 단식하고 굶어죽고 또 장례를 치룬곳이 바로  지유젠지(修善寺)이다. 이 사찰에 들어와 묘지가 시작되는 제일 앞쪽에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워놓은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다. 

 

 

 

 

면암(勉庵) 최익현 선생의 일대기. 

 1833 (순조 33)∼1906 (광무 10). 본관 경주(慶州).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庵).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지방관·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친일 매국도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 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對馬島)에 제자 임병찬과 함께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74세의 고령으로 스스로 굶어죽는 길을 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합 48권)이 있다.

최익현(崔益鉉) 선생 순국비를 배경으로  

 

 

 

 

 

 

이떼이안(以酊庵)

조선외교의 실무를 전담하는 관저였던 이떼이안(以酊庵)은 세이산지(西山寺) 안에 있다. 현재의 건축물은 화재로 손실 된 것을 복구한 것이나 입구 부분의 구조물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조선통신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옛 대조선 외교기관이라 할 수 있다. 

 

 

 

 

 

세이산지(西山寺)

세이산지(西山寺)는 1611년에 쓰시마 출신의 승려 겐소(玄蘇)가 개창한 절이다.  그러나 세이산지(西山寺)는 사찰보다 다른 이유때문에 우리나라에 더 알려져 있다.  이곳은 바로 일본 본토로 건너가기 전 이즈하라에서 조선통신사들이 묶었던 일종의 숙소인 것이다.  조선통신사를 위해 이곳을 숙소로 하고 또 조선외교의 실무를 전담하는 관저로서 이떼이안(以酊庵)이란 이름의 별도 건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세이산지(西山寺)는 조선과의 외교창구 겸 숙소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확실히 여지껏 다녀본 곳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갈함과 화려함이 서려있는 곳이다.  절이지만 조선통신사가 머무르던 숙소였던 인연때문인지 지금도 유스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는데 꼭 한번 더 와서 숙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아보였다. 

 

 

 

 

 

 

 

쓰시마(對馬島)에 있는 덕혜옹주비는 덕혜옹주가 대마도 번주 후예와의 결혼을 위하여 대마도를 방문했다는 사실만을 기념하는 비다.  그 결혼이 어떤 의도로 이루어진 것인 지, 결혼 후 생활은 어떠했으며  진짜 이혼사유는 무엇인지등에 대해서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이 비를 세우면서  비(碑)의 위치를 두고 행정당국과 꽤나 실갱이를 벌렸다고 하는데...  섬 전체를 한국풍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국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는 대마도인데 왜 이 비만큼은 실갱이를 벌일 정도로 비협조적 이었을까?  그건 덕혜옹주의 일생을 살펴보면 안다.

덕혜옹주는 조선 제 26대 왕 고종과 후궁인 양귀인 (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난(1912년) 외동딸이다.  고종의 회갑때 얻은 딸이어서 고종이 무척 아끼고 사랑했었는데 1925년 일본은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데려간다.  이후 일본에서 교육받고 생활하던 덕혜옹주는 1931년 대마도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 武志)와  강제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이 행복하지도 않았고 정신병까지 앓았으며 한명있던 딸까지 자살하는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게 된다.  이후 1962년 한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고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세상을 떠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가이드로 부터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덕혜옹주의 설명을 들으면서 비를 배경으로... 

 

 

 

 

 

 

조선통신사는 일본 에도시대에 조선에서 파견한 5백여명의 문화사절단으로 서울 출발 후 부산을 경유해서 대마도에 닿았다고 한다. 이때 대마도에서 환영행사로 2천여명을 동원됐다고 하니 우리나라가 대마도에 미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기념해서 지금도 대마도에선 섬 최대의 행사 ‘아리랑 축제’란 이름으로 매년 8월 조선의 문화사절단인 통신사 행렬을 재현하고 있다.  

  

 

 

 

 

쓰시마 시청사를 배경으로

정오가 되면 '고향의 봄'의 한 소절로 시간을 알려주고 있는 쓰시마 시청사를 배경으로. 엄청나게 큰 소리로 한 소절이 스피커를 통해 방송되는데 이것도 아마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일종의 서비스가 아닐까싶다. 일본의 관청에서 우리의 음악을 틀어준다는 것이 그만큼 우리관광객을 중요시한다는 반증인듯...  

 

 

 

반쇼인(万松院)은 에도시대 쓰시마번의 관청이 위치해 있었던 이즈하라의 서쪽 아리아케(有明) 산의 기슭에 위치해 있는 국가 사적으로 일본 3대 묘지 중 한곳이라고 한다. 묘지는 햐쿠간기(百雁木)로 불리는 132개의 돌계단을 오른 곳에 마련되어 있다. 이즈하라에 처음으로 관청을 둔 소가(宗家)의 제10대 사다쿠니와 요시토시 이하 32대까지의 번주와 그 가족의 묘가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쓰시마번은 십만석의 영지를 가진 번(藩)이었으나 웅대한 묘지의 규모는 수십만석의 영지를 가진 번에 버금간다고 한다. 본당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여러 차례 중건되었고 역대 장군들의 위패 및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반쇼인(万松院)의 입구에서. 쓰시마(對馬島)를 소개하는 책자에 자주 등장하는 풍경사진으로 우리도 방문기념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월요일인데다 한국 가이드가 단체 관광객에게 소개해주는 장소가 아니어서 부부가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다. 다행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일본인 가족이 있어 사진도 부탁했다.   

 

 

 

 

 

 

 

반쇼인(万松院)의 묘지는 일본에서 ‘가나자와(金澤)’의 마에다(前田) 집안의 묘지, ‘하기(萩)’의 모리(毛利) 집안의 묘지와 함께 일본 3대 묘지로 불리고 있으며,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소가(宗家)의 제10대 사다쿠니와 요시토시 이하 32대까지의 번주와 그 가족의 묘가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오래된 곳이라는 느낌만 올뿐 특이한 감상은 없었다. 

 

 

 

 

 

 

묘지로 올라가는 햐쿠간기(百雁木)로 불리는 132개의 돌계단을 배경으로. 내가 다녀본 쓰시마의 관광지중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는 곳이였는데 (300엔) 입장료를 들이더라도 한번쯤은 방문해서 주변의 경관도 돌아보고 이곳의 역사를 알아볼만한 곳이였다. 얼마 되지 않는 입장료 때문인지 가이드가 이곳을 소개하지도 않았고, 안내를 하지도 않았는데 오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것 같았다. 

 

 

 

 

 

 

반쇼인(万松院)의 본당에는 임진왜란때 일본 장군이었고 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의 위패가 있는 곳이긴 하지만 이곳을 방문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하나의 역사교육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원수이지만 그들에게는 영웅인 도쿠가와(德川)의 무덤도 아닌 위패 정도가 있는 곳이며 일본 3대 묘지 중 한곳인 반쇼인(万松院)은 쓰시마 관광중 가장 볼 것이 많았던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만큼 쓰시마(對馬島)는 쾌적한 자연환경과 낚시를 제외한더면  일본의 다른곳에 비해서 그다지 볼만한 관광거리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다.   

 

 

 

 

 

하찌만구 (八幡宮) 신사

이즈하라(嚴原) 시내에 있는 대마도의 대표적인 신사인 하찌만구(八幡宮) 신사. 토요타마오(豊玉町)에 있는 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와 더불어 대마도의 대표적인 신사이다.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상의 인물인 신공황후(神功皇后)를 받들고 있는 신사로 역사왜곡의 현장이기도 하다.  

 

 

 

 

 

 

 

 

하찌만구 (八幡宮) 신사 관람을 끝으로 쓰시마 여행을 마쳤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집을 벗어나 잠시동안의 휴식과 새로운 활력을 얻을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쓰시마 여행은 관광보다는 휴식의 개념으로 떠나야 할 듯하다. 잘 보존된 자연환경 이외에는 그다지 볼 것이 없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일본땅이고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된 볼 것을 찾아떠난다면 한번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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