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그리스, 터키('14.5)

터키 여행 26-17 (에페소 유적) (2014.5)

남녘하늘 2016. 9. 1. 00:23

 

 요한의 교회에서 내려와 식당으로 이동했다. 비빔밥이 나온다고 해서 한국식당인줄 알았더니 터키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이곳 역시 한국관광객의 단골집으로 보이는데 입구에서부터 태극기와 터기국기를 장식해 놓았고, 식당 1층에는 엄첨나게 커다란 태극기를 설치해 놓았다. 위치로 보아서 현지인들이 밥을 먹으로 올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고, 터키에 여행온 한국 여행객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식당이 분명했다. 비빔밥이지만 우리가 먹던 비빔밥과는 맛이 조금은 달랐지만, 터키사람이 만들어준 비빔밥이라고 생각하고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에페소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하드리아누스 신전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이 되어가니 함께 했던 일행들과도 많이 친해져서 스스럼없이 농담도 주고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함께 한 일행들의 숫자가 우리 가족을 포함해 11명밖에 되지 않으니 좋은 점도 많았다. 조금 더 일찍 친하게 지냈으면 내가 사진도 좀더 많이 찍어주고 저녁시간도 함께 보낼 수 있었을텐데, 이번에는 내가 일부러 내 성향과는 달리 일행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었다.

 

 

 

 시내에 있었던 식당에서 10여분 버스로 이동해서 수천년의 역사가 그대로 살아있는 고대 도시 에페소(Ephesus)에 도착했다. 인구 3만명의 중소도시인 셀축에서 3.5km 서쪽에 있는 에페소는 유적지는 30%만 발굴되었고, 70%는 지진으로 땅속에 묻혀있고 여전히 발굴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에페소는 로마제국 아시아 지방의 수도로 지금의 터키 서부해안에 있던 항구도시였다. 해상과 육상의 주요 무역로가 교차되는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아시아 지방의 교통과 상업 중심지 역할을 감당했으며, 당시에는 인구 25만명이 살고 있던 거대도시였다고 한다. 지금은 무너진 유적지와 유적지를 관람하러 오는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상점만 있을 뿐이다.    

 

 

 

 

 

 

 에페소 유적 입구는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있는데 우리는 남쪽 입구로 부터 출발한다. 지금은 유적으로만 남아 있지만 로마제국시절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셀수스 도서관을 비롯하여, 신전, 대형 목욕탕, 대리석 거리, 원형극장 등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이탈리아 폼페이와 함께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신약성서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도시로  기독교도들에겐 성지순례지로 각광을 받는 곳이다. 터키어로는 에프스(Efes)이지만 에페수스(Ephesus), 에페소스(Ephesos) , 에페소(Epheso)  에베소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에페소 유적지에 입장해서 더운 날씨로 인하여 나무 그늘아래에 모여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앞쪽에 쌓아져 있는 토관들은 약 2천년 전에 도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도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2천년 전에도 도시를 위해 토관을 제작해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고 도로까지 만들었다고 하니 우리의 역사와 비교해보면 한참을 앞서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토관이 쌓여져 있는 것을 구경하고 나서 오른쪽 언덕 아래쪽 무너져 내린 바리우스목욕탕터로 이동했다. 세개의 아치형으로 된 모습이 보이는데 아직 일부만 발굴된 상태라고 한다. 2세기경에 지어 졌는데도 냉, 온탕이 있고, 열탕, 사우나 시설까지 있었다니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다.    

 

 

 

 

 

 

 바리우스목욕탕을 지나 작은 소극장인 오데온(Odeon)으로 이동했다. 원래 오데온은 지붕이 있는 소극장으로 공연뿐 아니라 귀족들의 회의도 열렸던 곳이라 한다. 22층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1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원래 그리스어로 음악, 연극, 화랑을 의미하는 고대 오데온은 무대를 둘러 싸듯 계단으로 되어 있는 관람석이 있는 점은 야외극장과 같으나, 야외극장에 비해 그 규모가 훨씬 작다. 에페소의 북쪽 출입구에 있는 24,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대극장과 비교하면 규모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규모가 작다고 해도 여행자의 눈에 비춰지는 오데온의 모습이 이국적이고 엄청나 보인다.  

 

 

 

 

 

  가이드가 설명을 하는 동안 설명을 듣지 않고 사진을 찍기 위해 오데온의 높은 쪽에 올라가니 앞쪽으로 국영 아고라가 폐허가 된채 펼쳐져 있다. 나라에서 운영했다는 국영 아고라는 기원전 1세기 아우구스투스황제가 완성했다는 광장으로 국가의 중요행사가 열리는 곳이었으며 중심부에는 이시스 신전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보이는 것처럼 지금은 그저 돌덩이들만 흩어진채 폐허가 되어 있다. 나중에 사진찍을 시간을 주었는데 그 시간조차 주지 않을까봐 사진을 찍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몇가지 설명을 놓쳐버렸다. 설명 듣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데... 

 

 

 

 

 

 볼거리는 많고 비슷한 느낌의 유적이 많아서 설명을 듣지 않으면 유적의 차이점을 알 수고 없고, 또 시간이 지나고 나면 비슷한 유물로만 보여지기에 가이드의 설명에 더 집중해야 한다. 오데온에서 조금 지나쳐가면 오른쪽으로 검은 색과 흰색의 대리석이 함께 있는 기둥이 있다. 이곳은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된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으로 오늘날의 시청같은 곳이다. 시의회당으로 고관들의 회의장소와 리셉션 장소로 쓰였던 곳으로, 안내판에는 풍요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그림도 들어 있다. 하지만 이곳도 거의 허물어져 복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폴리오샘의 오른쪽 옆으로 도미티아누스 신전이 있다. 광장이라고 불리기에는 상당히 좁은 도미티아누스 광장 끝에 2층짜리 기둥의 유적이 도미티아누스 신전이다. 이 신전은 로마의 폭군이었던 도미티아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라고 하며, 1세기경에 지어젔다. 신전에는 7m가 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동상도 세워져 있었으나, 황제가 암살된 뒤 신전과 함께 동상도 파괴되었다고 한다. 워낙 많은 신전이 있고, 한번 보고 지나쳐서는 버리는 바람에 신전의 이름을 외우는 것도 쉽지 않고 기억해 내는 것도 쉽지 않다. 이제 서서히 혼란이 오기 시작하고 너무나 많은 유적에 싫증이 나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유적이 있다.     

 

 

 

 

 가이드가 설명을 마치고 잠시 사진을 찍을 시간을 주었다. 시간이 주지 않고 그냥 지나칠까 염려가 되어서 혼자 사진을 찍으려고 돌아다닌 행동이 우스워졌다. 주어진 시간에 다시 국영 아고라가 있는 넓은 광장쪽으로 이동해서 많은 기둥이 세워져 있는 공간을 가 보았다.  국영 아고라는 상거래 뿐만 아니라 종교 행사와 정치적 토론 및 선거를 위한 집회장소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곳의 기둥들은 에페소의 아고라(Agora)와 바실리카(Basilica)를 이루고 있던 기둥으로,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시기에 건축되었는데 이 기둥들의 모양이 바로 이오니아 양식이다. 바실리카는 도시의 공공건물을 일컫는 말이다.       

 

 

 

 


 도미티아누스 광장 앞쪽에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부조판 바위가 있었다. 니케 여신이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은 승리의 월계관인데, 스포츠용품으로 유명한 나이키의 마크가 이 니케여신의 치마자락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지만 믿을만한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이 부조판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문 위에 아치장식으로 쓰였던 것이라고 한다. 니케의 부조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 않는 관광객이 없는 것을 보면 니케가 유명한 여신임에 틀림없는 것 같은데 아무렇게나 광장에 던져지듯 있는 니케여신의 모습이 조금 안타깝다.   

 

 

 

 

 멤미우스 기념비를 지나 크레테스거리가 시작되는 부분에 위치한 헤라클레스의 문. 사자의 털가죽을 두른 헤라클레스의 흉상이 붙어 있는 기둥 두개가 나란히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문을 기점으로 귀족들과 서민들의 생활하는 공간이 나뉘어 진다고 한다. 윗쪽은 관공서와 정치, 경제를 다루는 상류사회의 공간이었다면 아랫쪽은 서민들의 삶이 녹아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그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하느라 그런 것인지 문의 폭도 좁고 기둥 아래에 세 개의 계단을 설치해 놓아서 수레가 지나갈 수 없도록 해 놓았다.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고 헤라클레스라는 상징성 때문인지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사진을 찍느라 정체가 생기고 있어 우리는 다른 사람 사진만 찍어주고 통과했다.   

 

 

 

 

 헤라클레스 문에서 내려다 본 크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 크레테스란 로마시대에 종교업무와 행사를 주관하던 사제를 말하는데 이 거리의 양쪽에 사제들의 동상과 유명 인사들의 동상이 있어서 크레테스 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지금 받침대 정도의 흔적만 남아 있다. 크레테스 거리가 시작되는 헤라클레스 문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그 유명한 셀수스 도서관이 멀리 보인다. 이 도로 좌우에는 로마시절 상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크레테스 거리를 걸어서 조금 내려오니 오른쪽으로  트라야누스(Traianus)의 샘이 나온다. 기원전 190년경 로마가 아나톨리아에 진출함에 따라 에페소는 그리스시대에서 로마시대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리고 에페소는 로마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시대에 가장 번성하여 로마의 5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 트라야누스의 샘은 트라야누스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에페소에 지어진 분수대이다. 샘 중앙에는 실물크기로 만들어진 황제의 석상이 있었다고 하며 황제의 발끝에서 물이 흘러나와 귀족계층의 가정과 목욕탕에 공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받침대와 석상의 오른발만 한쪽만 남아 있다.      

 

 

 

 

 

 

 크레테스 거리를 걸어 내려와 아래쪽에서 반대편을 바라 보았다. 헤라클레스 문쪽에서 바라다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드는 크레테스 거리다. 거리의 중앙은 대리석으로 포장된 마찻길로 지금도 상태가 괜찮은데 2천년전에 이런 길을 만들었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크레테스 거리를 걷다가 보았던 카멜레온의 모습. 그동안 TV를 통해서만 보아온 카멜레온을 유적지에서 만나니 신기하기 그지없다. 주로 마다카스카르와 아프리카에 있는줄 알았더니 지중해에도 카멜레온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움직임이 워낙 느려서 잡아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살아 남기 힘들것 같아 보였다.   

 

 

 

 처음 본 카멜레온에 신경을 쓰느라 하드리아누스 신전(Temple of Hadrian)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하고 사진도 남기지 못한채 지나쳐 버렸다. 지나고 나서 보니 상당히 의미있는 유적이었는데 아쉽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의 옆에서 시작하여 뒷쪽까지 차지하는 큰 목욕탕이 있는데 스콜라스티카 목욕탕(The Bath of Skolasticia)이라고 부른다. 로마제국 시대에 있어서 목욕탕은 문화생활의 중심지중 하나였다. 이 목욕탕은 1세기말에 처음 만들어진 졌는데 4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 것을 부유한 사업가 였던 스콜라스티카라는 여인이 5세기에 다시 3층짜리 건물로 지으면서 비잔틴양식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현재는 무너지고 1층의 외벽만 남아 있으며, 스콜라스티카의 석상이 있는데 이 석상도 목이 보이지 않는다. 고대의 수세식 공중화장실에는 50여명이 동시에 큰 볼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고, 공중목욕탕에서 쓰고 난 더운물이 공중 화장실로 흐르게 하여 수세식으로 뒤처리를 했다고 하니 그 시절에는 엄청난 도시였음에 틀림없다.  

 

 

 

 

 

 

 크레테스 거리 왼쪽 언덕에는 상가와 고급주택가가 있던 곳이다. 이 집들 중의 몇 곳은 복구공사가 끝나 공개되었고, 아직도 복원을 하기 위해서 출입이 통제된 곳도 있었다. 로마시대에는 부유층이나 유력자들만이 이곳에 살 수 있었다고 하는데, 상점들과 집들 앞의 인도 바닥은 정교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어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복원중이 건축물의 모습도 상당히 멋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음에 한번 더 방문하게 되면 복원데 고급주택가와 오늘 제대로 보지 못한 하드리아누스 신전을 볼 수 있으려나?   

 

 

 

 

 

 

 

(18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