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말레이시아 ('16.6)

말레이시아여행 20-11 (말라카- 삼포콩사원, 바바뇨냐 박물관, 자비에르 성당), (2016.6)

남녘하늘 2018. 1. 12. 00:16


 아침 일찍 명나라의 장군 정화를 위해 지은 삼포콩 사원(Sam Po Kong Temple)을 가 보기 위해서 숙소에서 나왔다. 구글 지도를 보니 숙소에서 700여m정도 떨어져 있어 그다지 멀지 않았다. 2012년 말라카를 왔을 때에는 위치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이번에는 지리 공부를 조금 하고 온 덕분에 가고자 하는 곳을 찾기가 편했다. 이른 아침 삼포콩사원을 가는 길에 이름도 없는 재래시장을 만났다. 이른 시간인데도 현지인들이 엄청나게 많다. 






 각종 열대과일과 생선, 튀김 등 먹거리를 많이 팔고 있었고, 굉장히 활기차 보이는 시장이었다. 과일을 사고 싶었는데 지금 사면 산책하는 동안 계속 들고 다녀야 할 것 같아서 되돌아 오는 길에 사려고 가격만 물어 보았더니 역시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시장이 아니어서 엄청나게 저렴하다. 산책을 하고 되돌아 오는 길에 다시 들르기로 했다. 시장 한켠에는 스님이 와서 탁발을 하고 있었는데, 말레이시아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스님이었다. 절에 가서도 스님을 보지 못했었는데... 






 시장 주변으로는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식당도 많이 보였다. 열대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음식을 하지 않고 아침부터 사먹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주변의 식당도 아침부터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노점에서도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간편하게 먹는 아침식사인 나시 르막(NASI LEMAK)을 팔고 있었는데, 식당을 이용하지 않고도 음식을 사 가지고 가서 먹기도 하는 모양이다.  





 부킷 챠이나(Bukit China) 언덕 기슭, 명나라의 장군 정화를 위해 지은 삼포콩 사원(Sam Po Kong Temple)으로 가는 길에 지난번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추모비를 보았다. 차를 타고 지나치면 보지 못하는데 걷게 되니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과거 2차대전 당시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침공하였을 때, 말라카에서 희생된 중국인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라고 한다. 추모비가 건립된 당시에는 말레이시아에 중국보다 대만의 영향력이 컸었는지 대만국기가의 문양이 보인다. 





 1405년부터 거대한 선단을 이끌고 인도양을 탐험했던 명나라 장군 정화(鄭和)의 원정이후 말라카의 술탄이었던 만수르 샤(Mansur Shah)는 명 황제의 딸 항리포(Hang Li Poh)를 왕비로 맞았다고 한다.  항리포가 500명의 시녀를 데리고 이 언덕 위에 살게 된 이후로 이곳을 중국인 언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삼포콩 사원은 정화장군을 기려 1795년에 지어진 사원이다. 얼핏 보면 불교 사찰처럼 보이지만 불교사찰이  아니어서 이곳에는 불상이 없다. 중국 관광객들이 이른 아침부터 방문해서 사원이 혼잡하다. 






 도교사원이라고 하면 반드시 신으로 추앙되는 누군가를 모신 사당이다. 특히 중국을 떠나 타지에 정착한 화교들의 사원에는 신의와 재물의 신 관우나, 바다의 신을 주로 모신다.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힘겹게 정착한 화교들은 대부분 장사를 하고 살았는데, 그들이 모시는 신은 바로 그들의 역사와 처지를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의 화교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정화의 항해에서 찾는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각지에는 정화를 모시는 사원인 삼포콩이 곳곳에 있다고 한다. 15세기 명나라의 장군 정화의 함대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까지 항해했었다고 한다.  




 부킷 차이나는 말레이시아 말로 중국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 언덕은 말라카 중국인들의 공동묘지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2차 대전 때 말레이시아를 침략한 일본군에 용감히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중국인의 무덤이 많다고 한다. 삼포콩 사원에 온김에 묘지가 어떤 식으로 조성되어 있는지 궁금해서 언덕을 한번 올라가 보았다. 아직 본격적으로 날씨가 더워지지 않은 시간이어서 가능했다. 언덕위에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무덤은 우리와 달리 시멘트로 집처럼 만들어 놓았는데, 생각보다 크고 넓은 언덕을 공원처럼 꾸며 놓아서 선입견만 없다면 공동묘지인지 모를 듯하다. 오히려 언덕 아랫쪽에 공동묘역이 따로 조성되어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침에 들렀던 시장에서 여러가지 과일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번 말라카 여행을 하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재래시장을 많이 보아서 기분이 좋다. 그냥 유명한 관광지, 사진이나 몇장 찍고 돌아가는 여행이었으면 이런 시장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용과와 바나나, 망고를 사가지고 왔는데 모두 맛이 좋았다. 다음에 다시 말라카를 찾아 오게 되면 다시 방문해서 또 이용할 생각이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다시 시내구경을 나갔다. 말라카에서 두 밤을 보내고 오전에 시내구경을 하고 나면 다시 쿠알라룸푸르로 돌아가야 한다. 말라카는 당일로 와서 잠시 구경을 하고 떠나기에는 아쉬움이 많은 곳이다. 2박 3일간 있었어도 절반도 구경하지 못한 듯하다. 다음에 다시 방문해서 이번에 가 보지 못했던 곳을 돌아보고, 좀 더 여유로운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 이번에도 나름 여유있는 여행을 계획하고 왔었지만 부지런히 돌아 다닌 기억이 더 많다. 숙소 앞에 네들란드 광장이고 말라카 강이어서 언제나 이곳을 지나쳐 가야 한다.  





 더치(네들란드) 광장에서 다리를 건너 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적갈색 4층 건물인 산슈공(San Shu Gong, 三叔公)이다. 로컬 푸드 판매점 겸 아이스 카페로 중국 과자인 월병, 초콜릿, 육포, 차, 커피, 꿀 등으로 다양한 상품도 판매하고카페에서는 말레이시아 빙수인 첸돌을 맛볼 수 있다. 그 앞을 수없이 지나 다녔지만 중국 관광객들이 너무나 많아서 선뜻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한번도 가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결국 떠나는 날까지도 한번 방문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에 또 오더라도 이렇게 붐비는 가게는 싫다.  




 비교적 이른 아침의 말라카 차이나 타운은 관광객이 몰려 오지 않아서 여유가 있었다.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따라서 걷다 보니 주말의 혼잡스러움이 없어서 너무나 좋았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점과 겔러리 등이 많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은 벌써 장사 준비를 마쳤다.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즐비한 골목길을 걸어 본다. 낡고 오래된 옛 건물을 실컷 볼 수 있는 거리. 그럼에도 볼거리가 많은 이곳을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바바뇨냐 전통박물관 (Baba & Nyonya Heritage Museum)을 찾아갔다. 중국이 명나라였던 15세기를 전후로 뱃사람과 주석 광산 노동자로 건너 온 많은 중국인이 말라카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남자였던 이들이 말레이 여성과 결혼하면서 중국식 문화와 말레이 문화의 결합이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결합은 중국 남성을 가르키는 바바(Baba)와 말레이 여성을 가리키는 뇨냐(Nyonya)의 합성어인 바바 뇨냐 또는 페라나칸(Peranakan)으로 불린다. 바바뇨냐는 현지화한 중국 문화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음식도 바바뇨냐 음식이 따로 있다. 박물관은 10시에 문을 여는데 우리가 너무 일찍 도착해서 아직 개관을 하지 않았다. 입장료는 16링깃으로 말라카에 있는 박물관 중 가장 비싼 것 같다. 박물관 바로 옆 카페에서 차를 한잔 하면서 기다릴까 하다가 주변을 조금 돌아보다가 다시 오기로 했다. 






 잘란 툰탄쳉록(Jalan Tun Tan Cheng Lock)에 위치한 바바 뇨냐 전통 박물관은 웅장하고 위엄 있는 중국식 가옥 안에 세워졌으며, 외관은 네덜란드풍의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야시장이 있는 거리가 너무나 복잡하고 사람이 많아서 자주 이 길을 지나쳤는데 이곳에 바바뇨냐 박물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한산한  아침 골목길이 운치가 있다.  






 주변을 돌아 보니 중국 전통 신발인 전족을 판매하는 상점이 있었다. 말로만 듣던 전족인데 실물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전족은 중국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3∼4세 부터 천으로 발을 묶어 성장을 정지시키는 가혹한 풍습이었다. 전족을 시키는 이유로 여자들이 가정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라는 말이 많았으나 전족은 뼈가 가늘어지면서 여성의 신체가 날씬해지고 미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이 있다. 어찌되었던 여성에게 가혹한 일이었는데 그 풍습이 중국인을 통해서 말레이시아에까지 왔던 모양이다. 이제는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져 판매가 되고 있는데 가격은 생각보다 엄청 비싸다.  





 시간을 좀 보내고 나서 바바뇨냐 박물관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추어서 다시 방문했다. 벌써 나만큼이나 부지런한 서양사람 몇 명이 와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봐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영어 안내책자를 건네줬다. 안내책자를 준 이유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이기 때문이다. 현관 말고는 모두 촬영 금지였다. 돌아다녀 보니 굳이 촬영을 금지할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너무 빡빡하다는 느낌이다. 입장료도 16링깃으로 말라카에 있는 박물관 중 가장 비쌌다. 바바뇨냐 박물관은 실제 화교가 살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출입문에서부터 집안 구조까지 곳곳에서 100년이 넘는 바바 뇨냐의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집의 규모만 봐도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의 생활 양식을 말해 주는 가구부터 결혼식 때 사용한 예복과 함, 중국인들이 마작을 즐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방 등을 둘러 보았다. 말라카에서 태어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만든 사설 박물관인 바바뇨냐 전통 박물관에는 중국인들의 말레이 반도 이주 100년이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인텔리로 보이는 여자분이 따라 다니면서 설명을 해 주었은데 유창하고 쉬운 영어를 사용해서 알아듣기 편했다.  





 사진 촬영은 현관만 가능했다. 나와서도 왜 시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관 입구에서 몇 장을 찍고 다시 박물관을 나와서 외관 몇 장을 더 찍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페낭에 있는 페라나칸 맨션이 규모 면으로나 전시 상태로 보나 말라카의 바바뇨냐 박물관보다 더 낳다고 한다. 페낭의 페라나칸 맨션은 사진촬영도 가능하다고 한다.   





 다시 말라카 강을 건너서 숙소 근처에 있는 산 프란시스 자비에르 성당을 방문했다. 이곳을 방문하고 나서 숙소로 돌아가서 짐을 챙겨서 쿠알라룸푸르로 되돌아 가야 해서 제일 끝으로 방문할 생각이었다. 스페인 출생의 신부 자비에르는 예수회 수사로서 말라카에 왔다. 자비에르 신부는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가톨릭을 포교하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성당은 그를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역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에도 같은 이름의 교회가 있다. 기도원으로도 사용하면서 포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벽만 남아있는 세인트 폴 성당에는 아직도 신부님의 동상이 있다. 






 쟈비에르 성당 구경을 끝으로 말라카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다시 쿠아라룸푸르로 향해서 떠난다. 2박 3일동안 말라카의 모든 곳을 가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많은 곳을 돌아 보았고, 휴식의 개념이 많이 가미해서 좋은 시간도 보낸 듯하다. 말레이시아에 오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곳도 볼거리가 많겠지만 이곳 말라카 여행은 빼놓지 않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말라카 구도심으로 올때와 같은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이동하는데 일방통행 길이어서 바닷가도 지나친다. 도심과 물속을 운행하는 덕버스도 보였는데 운항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다음에 다시 한번 더 방문해서 타봐야겠다.  





 말라카에 도착했을 때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사람이 많아서 고생했던 말라카 센트랄 터미널, 되돌아 갈 때에는 한산해서 좋았다.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버스의 종류도 많았고, 차편도 엄청나게 많이 있다. 이렇게 차가 많은데 올 때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날자를 잘못 선택해서 말라카로 왔던 것이 맞는 듯하다.터미널 인근에 대형 양판점이 보였는데 이제는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것이 중요해서 그냥 빨리 오는 버스를 타고 되돌아 간다.   






 말라카에 올 때와는 역순으로 말라카에서 출발해서 BTS( Bandar Tasik Selatan)터미널에 도착해서 다시 열차를 타고 쿠알라룸푸르 시내로 돌아왔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도 말라카에 갈 때 보다 훨씬 적게 걸렸고,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도 그다지 많이 기다리지 않았다. 쿠알라룸푸르로 돌아오는 길에는 그디지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는 않았다. 다음에 말라카를 갈 때는 무조건 시내에서 터미널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할 것이다. 중간에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나 많았다.  






(1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