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중국 서안 ('07.7)

서안(西安)여행 4-1 (화청지,진시황릉), (2007.7)

남녘하늘 2008. 11. 2. 13:12

  

아이들 여름방학을 맞이해 가족여행을 떠난다. 큰 녀석이 벌써 고등학교 1학년인지라 함께 시간을 내어서 떠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공부는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기에 함께 떠나기로... 처음에는 일본의 교토와 나라,오사카 고베쪽을 생각했었는데 일본 은 자주 가서 싫다는 의견이 많아 중국으로 변경하고 기원전 11세기부터 10세기까지 13개의 왕조가 도읍으로 정했던 서안을 목표로 삼았다. 떠나기전 인천공항에서... 

 

 

 

 

내년에는 큰 녀석이 고2, 후내년에는 고3, 그 다음해에는 작은 녀석이 고2, 그 다음해에는 고3, 그 다음에는 큰 녀석이 군대입대...... 이러다 보면 이번이 아이들이 어릴때 온가족이 함께 떠나는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지 모를 일이다. 이미 아이를 키워본 선배의 말처럼 가족이 함께 여행할 수 있을때 함께 다녀야 하는데 어느새 나도 아이들이 점점 커버리고 있다. 앞으로 더 커버리면 우리 부부와 함께 다니려고 생각이나 할까?  

 

 

 

 

단체여행을 나가기 앞서 아침일찍 일어나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넓은 땅을 가진 나라인지라 곳곳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 일요일 아침이어선지 공원 곳곳에서 운동과 춤, 무술을 즐기는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서안은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로 꼽히는 도시인데 지금은 북경이나 상해에 비해서 많이 낙후되어 있고 도시도 깨끗하다는 느낌은 주지 못하지만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느낌은 도시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중국은 아직까지 개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이다. 상하이나 베이찡들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도시가 지저분하고 체계적이지 못하다. 그것도 당이 결심하면 움직인다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서안에서 맞은 첫 아침의 느낌도 다른 중국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깨끗하지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서안은 서역과 페르시아 등지로 비단등을 교역하는 출발지였고 또 무역을 위해 많은 이민족들이 몰려든 곳이기도 하다. 특히 당나라때에 페르시아 상인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장안에 들어왔는데 그 때 왔던 페르시아인들이 정착하여 오늘날의 회족촌을 만들었다. 이곳 서안에는 한족을 제외한 소수민족 중에는 회족이 8만여명으로 가장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고루의 정문을 통과하여 약 300m 거리의 이곳 번화가는 ‘서안의 명동’이라는 별명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번화한 거리이며 서안에 살고 있는 이슬람교도의 종교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침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이슬람의 거리의 느낌을 얻지 못해 아쉬웠다.   

 

 

 

 

회족 거리 (回民街:후이민제)에서.

서안 시내의 최고 중심지에는 종고루광장인데 전면에는 아침을 시작하던 종루가 있고, 좌측 편에는 하루의 끝을 알리던 고루가 있다. 고루의 정문을 통과하여 약 300m 정도의 번화가가 ‘서안의 명동’이라는 별명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번화한 후이민제(回民街)거리이다. 이곳은 서안의 대표적인 회족 거주구역으로 회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얀 모자를 쓴 사람들이 거리 양편에 쭉 늘어서 여러가지 음식과 기념품을 팔고 있다. 

 

 

 

 

고루(鼓樓 :구로우)를 배경으로   

서안 여행의 출발지로 광장을 끼고 장안대로에 중간에 세워진 것이 종루(鐘樓)이고, 사진의 배경으로 삼은 것이  고루(鼓樓)이다. 종루는 교통의 중심 관문이고, 고루는 시장가로 우리나라의 명동거리와 같은 곳이다. 둘다 종과 북이 달려 있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화청지(華淸池 : 화칭츠)에서

화청지(華淸池)는 서안에서 30㎞정도 떨어진 여산(驪山) 산록에 있는 온천이다. 역대 제왕이 별장을 세워 휴양했던 곳이며 당나라 말엽 양귀비와 현종이 사랑을 나누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이미 서주(西周)시대에 이곳에 여궁(驪宮)을 세웠으며, 당나라 현종시대에는 이곳을 더욱 크게 넓혔고 이름을 "화청궁"이라 고쳤다. 또한 이곳이 온천위에 지워졌으므로 "화청지"라고도 불리웠다. 당시(唐詩) 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시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화청지(華淸池 : 화칭츠) 뒤로 있는 산이 서안사람들의 애환을 품은 여산(驪山)으로  간쑤성 남부에서 동쪽으로 한없이 뻗어온 천령산맥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최고봉은 1300미터이고 그생김새가 달리는 말처럼 날렵하다고 해서 여산이라고 부른다. 서안에서 동북쪽으로 30km 떨어진 여산은 주나라때부터 있었던 곳으로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온천지이다. 진시황도 이곳에 건물을 짓고 온천을 즐겼고 한무제, 수문제, 댱태종등 모두 이곳에 탕천궁을 만들어 자주 들렸던 곳으로 전해진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역사적인 러브스토리의 무대인 화청지.

756년 현종이 양귀비에게 푹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 탓에 안록산이 '안사의 난'을 일으켜 화청지는 불에 타서 훼손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된 것은 청나라말부터 시작하여 1958년 대규모의 문화재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란다.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명으로 불리는 양귀비는  본명이 양옥환으로 본래 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비로 현종의 며느리였다. 그런데 현종이 자신의 아내인 무혜비가 죽자, 시아버지란 체통도 망각하고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도를 중시하는 중국에서는 매우 지탄받을 일이었는데, 이를 무마하기 위해 현종은 일단 양귀비를 도교의 승으로 출가를 시킨 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는 편법까지 동원했다.이때 양귀비의 나이 22세, 현종은 57세였다. 그녀는 얼굴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노래와 춤도 뛰어났고, 특히 비파의 명수였다. 게다가 머리 회전이 빨라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결과는 안록산의 난에 의하여 37세에 목숨을 잃는 것으로 끝난다. 화청지에 얽힌 양귀비와 현종의 간단한 러브스토리다.  

  

 

 

 

 


뒤로 보이는 양귀비 입욕(入浴) 조각상은 높이 3m의 입체 조각상이다. 여우가죽을 걸치고 육체를 반쯤 노출시킨 양귀비가 머리를 숙여 요염한 자태로 천천히 욕탕에 들어가는 모습으로  성당(盛唐)시대 궁정 귀부인의 화려한 생활상이 나타나 있다. 중국의 유명한 조각가이자 광주미술대학(廣州美術學院) 교수 반학(潘鶴)과 단적여(段積余)가 설계 조각했다고... 아이들과 같이 쳐다보기 민망한데 그래도 화청지를 다녀오면 꼭 사진을 찍어야할 장소이기에...다만 우리가 방문했을 때에는 주변에 공사를 하고 있어 다소 혼잡스러워 보였다. 

 

 

 

 

  

화청지 목욕탕의 유적박물관은 연화탕(蓮花湯), 해당탕(海棠湯), 태자탕(太子湯), 상식탕(尙食湯), 성진탕(星辰湯), 문물진열실, 황제의 약욕(藥浴)탕이 있다. 그 중심에 흰색의 대리석으로 조각한 높이 3m의 반라의 양귀비 입상이 있다. 연화탕(蓮華湯)은 현종의 전용 목욕탕이다. 목욕탕 유적박물관에 았는 다른 탕에 비해선 약간 단조로우나 웅장하고 황제의 위엄을 느끼게 해준다. 혼자서 그 큰 목욕탕을 혼자서 쓸수 있다니 역시 권력은 대단하다.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 단층 기와 건물이 보인다. 여산을 등지고 구룡호를 내다볼 수 있는 곳이 오간청이다. 중국 근현대사가 남아있는 이건물이 '제2차국공합작'의 시발점이 된 것이기도 하다. 청의 붕괴로 전국이 분열되어 크게 혼란스러울 때 공산당을 이끄는 마오쩌둥은 일본에 항전을 국민당의 장개석은 공산당 토벌에 전력하며 전국 통일을 이루려 애썼다, 장개석에겐 공산당을 없앨 목적으로 1936년말 만주의 장학량과 양호성이 서안지역에 머물렀다. 장개석은 그들 군인을 격려하기 위해 서안으로 가서 오간청에 머물렀다. 그를 따르던 장학량은 공산당 소탕에 주력하는 장개석에 반기를 들고 오간청을 향해 총격을 가하자 장개석은 잠옷 입은채로 부랴부랴 뛰쳐나와 여산 촉장정에 몸을 숨겼지만 몇시간만에 잡혀 감금되었다. 이것이 1936년 12월 12일에 일어난 '서안사변' 이다. 이를 계기로 장개석과 주은래가 맞대고 논의한 끝에 그해 12월 25일 내전중지, 공동의 항일투쟁, 정치범 석방등을 합의한 것이 '제2차 국공합작'이다. 군데군데 벽채엔 총탄 자국이 다급했던 순간을 말해주는 듯하다.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서안에서 동북쪽으로 30km떨어진 지점인 산시성 임동현 안채향 서양촌에 자리하고 있다. 여산 북쪽 기슭에 높이 76m의 야산으로 진시황 즉위 13세부터 49세까지 여불위로 하여금 36년의 통치기간동안 무덤을 만들게 하여  엄청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한 곳이다. 그당시 위정자들은 내세에서도 현세와 같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능은 장방형으로 내성(2.5km)과 외성(6.2km)으로 지하능의 높이는 30m의 사후세계에 거대한 꿈을 이루고자 했었던 것같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고 도굴방지를 위해 여러 장치를 했으나 진나라가 망하면서 많은 보물을 약탈당했다.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하는 장치도 갖추었다고 하나 아직 발굴하지 않고 있다.
 
진시황릉은 2002년부터 원격탐지기와 탐사로 내부를 조사하던 중 계단 모양의 토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토성은 4개의 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 9계단이 만들어져서 진시황의 영혼이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기위해 만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무덤이 들어서기전엔 위수강과 여산사이에 있는 평지였는데  능을 만드는데 필요한  흙이 없어 십리밖 위수강변에서 옮겨와 쌓은게 이정도로 2200년동안 비바람에 깎여 지금의 능모양을 이루고 있다.  

 

 

 

 

 

 

 

 

진시황릉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 무덤이라기 보다는 조그마한 동산에 올라왔다는 느낌.  사람의 무덤을 얼마나 크게 만들었으면 이처럼 하나의 산이 되어 있을까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 이처럼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을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그 시대 사람들은 고통을 당했겠지만 후세대 사람들은 이를 관광지로 만들어 돈을 벌고 있으니 역사의 아리러니다.

 

 


진시황릉 정상에서 안개 너머로 내려다 보이는 관중평야지대. 이 평야가 있었기에 진나라가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석류나무와 복숭아나무가 가득차 있다. 

 

 

 

진시황의 무덤에는 석류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다. 진시황의 무덤뿐만 아니라 이 근처에는 온통 석류밭이다. 가도 가도 석류나무와 복숭아 나무밖에 없은 것 같다. 이런 대규모의 농장에서 대규모로 농산물이 생산되니

우리나라 농민들의 경쟁력은 중국에 비해서 뒤질 수 밖에 없다. 땅값도 비싸고 인건비도 비싸고 중간상인이 중간에서 폭리를 취하는 구조이니..... 뒤로 보이는 나무도 오른편 큰 마루를 제외하곤 대부분 석류나무이다.

 

 

 

 

 

 

  

 

 진시황 지하궁전. 기대했던 진시황의 지하궁전은 진시황의 궁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임의로 만들어 놓은 구조물에 불과하다. 진시황능은 앞에서 사진에서 보았듯이 아직 발굴되지 않았고 그냥 산이다.  여행사와 중국 당국이 수입을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기대를 가지고 갔으나 실망이 가득, 중국 사람들의 수준에서 보면 상당히 비싼 입장료...

 

 

 

 

 

 

(2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