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우즈베키스탄('09.5)

우즈베키스탄 여행 5-3 (사마르칸트- 구르 에미르, 레기스탄 광장), (2009.5)

남녘하늘 2009. 12. 1. 13:46

 

 

타쉬켄트에서 남서쪽으로 350㎞ 떨어진 곳에 중앙아시아 최고(最古)의 도시가 숨쉬고 있다. 티무르제국의 옛 수도이자 실크로드 교역지로 번창했던 사마르칸트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과 서, 남과 북을 잇는 교차점에 위치한 탓에 많은 민족이 이 지역을 탐냈다. 티무르 제국 이전인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13세기까지 이 지역의 주요 도시로 중국에서는 강국(康國)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군의 침입으로 이전의 도시와 유물은 파괴되고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은 대부분 14세기 이후 티무르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사마르칸드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도시이기도 하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중심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 라는 뜻을 지녔다.

 

도시의 나이는 2800여년. 그리스 로마의 도시생성과 비슷한 연배여서 '중앙아시아의 로마'라는 별칭이 따른다. 대표적인 유적은 '구르 에미르(왕의 무덤)'로 티무르제국의 영웅, 아미르 티무르가 전사한 손자 무하마드 술탄을 위해 1404년 지었다. 하지만 티무르 자신도 다음해 중국 명나라 원정 도중 사망해 이 곳에 묻혔다. 내부에는 티무르 일가의 관 여러 개가 놓여 있다. 

 

나보이를 떠나 사마르칸트로 진입을 알리는 조형물. 아직 사회주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어 도시를 통과할 때마다 경찰들이 검문을 하고 있다.

 

 

 

아직 우즈벡에는 개발도상 국가들이  그렇듯이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나보이에서 사마르칸트를 거쳐 타쉬켄트로 이동하는 중에 길가에 나와서 놀고 있는 사람이(특히 남자) 많았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90% 이상이 여자들이고,  2-3명이 무리지어서 이야기하며 다니는 것이 우리나라의 정서와 비슷해 보였다. 남자들은 걸어다니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고 학생조차도 걸어나니는 사람은 여학생들이었다. 결국 남자들은 게으르거나 아니면 차량을 이용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조그만 마을의 시외버스 터미널 정도인듯...

 

 

 

 

뽕나무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 밭의 크기가 상당하다. 밀이 자라고  있는 밭은 녹색을 뛰고 있고, 목화 파종을 위해 갈아 놓은 밭은 황토색으로 보였다. 차를 타고 지나면서 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규모의 밭도 많이 보였다. 숲이 보이지 않는 초지가 많았고, 가끔씩 나오는 산에는 역시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자연상태에서는 나무가 자라기에는 물이 부족한 것이다.   

 

 

 

이동중에 음료수를 구입하기 위해 들린 도로변의 식당. 식당과 더불어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본 꽃인 개양귀비꽃. 양귀비 꽃처럼 크기는 크지 않지만 모양은 닮았고 예쁘다. 차량으로 이동중 가장 많이 본 꽃이고 일부 지역에서는 꽃밭을 꾸며놓은 것처럼 느껴질만큼 많은 야생 개양귀비 꽃이 많이 피어있었다. 아마 우즈벡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이꽃을 본다면 고향생각이 날만큼 지천에 많이 피어 있었다.

 

 

 

김기환처장님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의 도로에 움직이는 차량은 대우자동차(우즈벡 대우)가 장악하고 있었다. 티고, 마티즈, 다마스, 라세티등 ...  택시는 마티즈가 많고 시내에 움직이는 전체차량 10대중 6-7대는 대우차이다. 그 중에서도 타쉬켄트은 마티즈가 많고 사마르칸트등 지방에서는 다마스가 엄청나게 많았는데, 지방에서는 일종의 마을버스로 이용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나보이에서 타쉬켄트로 이동은 현대자동차를 이용했다. 한국차가 이렇게 국민차로 이용될 수 있도록 노력했던 기업인들의 발빠른 판단과 혜안에 존경을 표한다.   

 

 


우즈베키스탄에 가면 우즈벡의 영웅 아미르 티무르가 수도로 정하고,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문화와 역사를 꽃 피웠던 사마르칸드에는 한번 가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마르칸드에는 과거 우즈베키스탄의 문화와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적들이 많이 있는데, 대부분이 과거에 전쟁으로 인해 훼손되었던 것을 많이 복원한 것이다. 복구한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사마르칸드에는 관광 성수기가 되면 우즈베키스탄에서 유일하게 관광객이 현지인 보다 많아지는 곳이다.

사마르칸트에 와서 처음 방문한 곳은 '구르 에미르'. '구르'는 무덤, '에미르'는 왕이라는 뜻으로 구르 에미르는 왕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아미르 티무르가 오트라르 원정에서 죽은 자신의 손자 무하마드 술탄을 위해서 지은 무덤이다. 이 무덤은 1404년에 만들어졌고 이듬해에 중국 명나라를 원정하러 가던 도중에 병으로 사망한 티무르도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처음 보이는 것은 아미르 티무르의 원정로로  티무르 제국의 전성기 시절 지도였다. 사마르칸드를 수도로 했던 티무르 제국은 인도의 델리에서 북으로는 타슈켄트까지, 서쪽으로는 바그다드를 넘어서 이스탄불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전성기 시절 칭기스칸에는 못 미치지만 그에 버금가는 넓은 영토다. 하지만 칭기스칸과 아미르 티무르는 중요한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칭기스칸은 원정을 끝내고 나면 그 지역에 자신의 혈통과 통치수단에 맞는 체제를 구축해 두었다. 하지만 아미르 티무르는 그런 체제를 원정지역에 마련해놓지 않았다. 그냥 벼락같이 쳐들어가서 정복하고 노획물을 챙겨서 돌아오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몽골제국은 칭기스칸이 죽은 이후에도 유지되었지만, 티무르 제국은 티무르 사후에 분열되고 축소되었다.  

 

 

 

 

모자이크 패턴으로 되어 있는 돔과 역시 아름답고 다양한 색상의 정교한 문양으로 장식된 모자이크 건물 벽이 인상적이다. 푸르고 큰 둥근 지붕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면 더욱 환상적인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티무르의 묘비는 티무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큰 덩어리의 연옥을 조각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진으로 찍은 내부의 모습은 실제로 본 것과는 차이가 많다. 화려한 실물의 모습을 사진이 완벽하게 재현해 주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안쪽으로 들어서면 티무르 일가의 관 여러 개가 있다. 가운데에 있는 흑녹색의 관이  티무르의 관, 그 북쪽은 스승의 관, 우측과 좌측에는 각각 무하마드 술탄과 아들 샤 루흐의 관이다. 하지만 이건 위치만을 나타낸 관이고 실제 관은 같은 위치의 지하 4미터 아래에 있다고 한다. 구르 에미르의 내부에는 단순하게 왕의 무덤만이 있기는 하지만 밖에서 보는 것과는 또다른 느낌의 화려함이 가득차 있었다.    

 

 

 

 

 '구르 에미르' 관람을 마치고 사마르칸드에서 가장 유명한 레기스탄(페르시아어로 모래땅이라는 의미) 광장으로 이동했다. 레기스탄 광장에는 앞과 양 옆으로 거대한 입구가 하나씩 자리잡고 있다. 세 건물들의 벽과 입구, 기둥 모두 화려하고 세밀한 이슬람 예술이 가미되어 있어 무척이나 아름답다. 왼쪽이 울루그벡 메드레세, 오른 쪽이 쉐르도르 메드레세 그리고 가운데가 틸라카리 메드레세라고 불린다.  '메드레세'는 이슬람 신학교을 말한다.

 

 

 

 

레기스탄 광장은 15~17세기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사마르칸트 건축 양식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정면의 틸라카리 메드레세를 비롯해 좌측의 울르그벡 메드레세, 우측의 쉐르도르 메드레세 등 거대한 건축물이 광장을 호위하듯 서 있다. 청록색 터키석으로 촘촘히 장식된 벽면이 정교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왼쪽의 울루그벡 메드레세는 티무르왕의 손자이자 학자이었던 울루그벡이 1420년에 세운 신학교이다. 종교뿐만이 아니라 수학, 천문학, 철학 등의 다양한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레기스탄 광장 오른편에 있는 쉐르도르 메드레세. 압둘 자바르라는 건축가가 만든 정문에 사슴들을 쫒는 호랑이 같은 사자의 그림이 조각되어 있는데 우즈베키스탄 200슘짜리 지폐에 그려진 호랑이가 이 그림이다. 벽의 화려한 무늬들은 언제봐도 화려하고 아름답다.  

 

 

 

 

왼쪽에 있는 울루그벡 메드레세 내부에 있는 울루그벡과 학자의 동상. 울루그벡은 티무르의 손자로 문무를 겸비하였고 특히 철학 수학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 이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긴 우즈베키스탄의 세종대왕 같은 인물이다.    

 

 

 

1636년에 완공된 쉐르도르 메드레세.  쉐르도르는 용감한 사자라는 의미이다. 이슬람에서는 사람이나 동물과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이슬람 사원 등에 그려진 예술을 보면 주로 풀과 나무와 같은 자연을 형상화한 기하학적 무늬들의 연속적 배열이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종교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쉐르도르 메드레세 입구 아치에는 어린 사슴을 쫓는 사자(사자보다는 호랑이에 훨씬 가깝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간혹 일부 왕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금령을 깨고 표현하기도 했다. 

 

 

 

 

 

칭기스칸과 아미르 티무르는 약 200년의 차이를 두고 차례로 중앙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를 정복했다. 대 제국을 건설했다는 점에서 이 둘은 비슷하다. 유목생활을 하던 세력이 유럽의 정주문명으로 치고 들어와서 파괴하고 약탈했다는 점, 서양인들이 칭기스칸과 티무르의 침략에 대해서 '고대문명을 응징하기 위해 파견된 신의 채찍'이라고 부르는 점도 동일하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아미르 티무르는 제국의 수도였던 이 사마르칸드에 자신의 무덤을 비롯해서 많은 건축물을 남겼지만, 칭기스칸은 별다른 건축물을 남기지 않았다.   

 

 

 

 

사마르칸드에는 지난 날의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적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중 대부분이 전쟁과 지진으로 인해 과거의 모습을 많이 훼손되었던 것들을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전쟁과 지진으로 인해 손상된 유적들의 사진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광장 정면에 있는 틸라카리 메드레세는 1647년 쉐르도르 메드레세를 세운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급히 세워진 메드레세이다. 광장 우측에 있는 쉐르도르 메드레세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문양으로 표현을 했기 때문에 수 많은 무슬림들의 불만을 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전통적인 양식으로 더욱더 화려하게 이 메드레세를 건축하였다. 틸라카리는 ‘금박으로 된’이라는 뜻으로 메드레세 안으로 들어가 좌측편 푸른돔 아래의 예배당을 보면 그 이름이 어울림을 알 수 있다. 벽면과 천장을 모두 금빛으로 장식을 하여 화려하기 그지없다.  

 

 

 

 

 

레기스탄 광장에서 화려하고 세밀한 이슬람 예술이 가미되어 있는  울루그벡 메드레세, 쉐르도르 메드레세, 틸라카리 메드레세를 배경으로...  

 

 

 

 

사마르칸트에서는 다마스가 마을버스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차량 앞 유리창쪽에 차량노선번호를 적어놓고 그 노선을 운행하면서 정류장이 따로 없이 아무곳에서나 타고 내릴 수 있는 체계였는데, 수많은 대우자동차가 마을버스로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기분나쁠 한국 사람이 있을까?  많은 우즈벡의 사람들이 한국인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에 와서 일하고 있는 우즈벡 사람들에게 더욱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따뜻한 말한마디라도 해 주어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시간이 없어 사마르칸트의 다른 유적들은 관람하지 못하고 타쉬켄트로 이동중 보이는 몇몇 건물을 이동중에 사진으로만 몇 장 남겼다. 다음에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내가 계획하고 있는 여행이 가능할 때 꼭 한번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이곳 사마르칸트를 방문해서 이번 여행에서 보지 못한 여러 곳을 다녀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구 소련 시절 건설된 도로가 우즈베키스탄으로 독립한 이후 보완되지 않아서 노면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대도시 주변은 그나마 양호한데 도시를 벗어나면 상당히 심각해진다.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는 도로도 많이 있었고, 패여진채 방치되어 있는 도로도 많아 차량이 속도를 높이고 싶어도 높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런 도로 인프라가 우선적으로 개선되어야 할텐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타쉬켄트에서 사마르칸드까지 300여Km 떨어진 가까운 거리임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부실한 포장상태에 기인하고 있었다.   

 

 

 

 자연강우가 부족하니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산이 온통 나무가 하나도 없는 민둥산이 많다. 도로 주변에 있는 나무들은 주기적으로 물을 주어서 성장이 가능한 듯하다. 그나마 초지라도 형성하고 있는 곳에는 푸른 빛이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타쉬켄트로 이동중 마지막으로 만난 검문소.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이런 검문소와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경찰들이다.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