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우즈베키스탄('09.5)

우즈베키스탄 여행 5-4 (타쉬켄트- 올로이 바자르, 아미르티무르광장), (2009.5)

남녘하늘 2009. 12. 2. 13:57

 

마르카지 호텔에서 내려다 본 타쉬켄트 시내 전경. 타쉬켄트 신도심의 한가운데 있는 호텔인지라 주변에 녹지가 가득하고 사무실 같은 빌딩과 호텔만 보인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공간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구도심의 주거지역에 있다.  

 

 

 

 

구소련에서 4번째로 큰 도시였던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쉬켄트는 러시아 식민통치를 받던 19세기 이후 성장한 도시이다. 찬란한 고대 유적을 자랑하는 사마르칸트나 부하라와 달리 우즈베키스탄의 현대사를 말하고 있다. 1966년 대지진으로 인해 건물의 대부분이 그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여행자들이 타쉬켄트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소련다운 분위기의 도시라고 말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앞서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서 타쉬켄트 시내구경을 나갔다. 도착 다음날 아침에 달리면서 봐 두었던 호텔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올로이 바자르를 방문하고, '스탄'이 들어가는 CIS 국가중에는 유일하게 우즈베키스탄에만 있는 타쉬켄트의 지하철을 한번 타보기로 했다. 아침에 혼자 나가지 않으면 시장구경도 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지하철도 한번 타보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올로이 바자르 (OLOY BOZORI). '바자르'는 아랍말로 시장이란 뜻이다. 올로이 바자르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시장으로 얼마전까지는 알라스카이 바자르로 불렸다고 한다. 지하철 Oloy(올로이)역과 맞붙어 있어 접근성도 좋고, 과일과 야채 생선을 판매하는 타쉬켄트에서는 비교적 큰 바자르이다.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입구에는 사람이 없어 아직 시장이 열리지 않았는 줄 알았다.   

 

 

 

 

정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많은 차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상인과 물건을 상인에게 팔러온 사람, 물건을 사러온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사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TV에서 자주 보았던 고려인 후예들이 많이 있다는 꾸일루크 바자르엘 한번 가보고 싶었고, 우리와 같은 핏줄이 흐르고 있는 고련인의 체취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김병화 농장'을 구경하고 싶었다. 김병화 박물관에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당한 고려인들의 고단한 삶의 역사를 증언하는 사진과 물품, 서류들이 전시돼 있다. 이주 1세대 중 한 사람인 김병화(1905~1974) 선생은 이주 직후 300만 평의 황무지에 물길을 놓고, 목화, 밀, 벼농사로 새 삶의  터전을 일구며 집단농장을 개척했다. 농장장으로 콜호즈를 이끌며 매년 쌀과 목화 생산에 혁신적인 성과를 거뒀으며 그로 인해 한때 많게는 1924가구, 7823명(고려인과 우즈벡인 포함)까지 속해 있던 대규모 농장을 일궜다.

 

그러나 이번 여행이 혼자서 하는 일정도 아니고, 또 이번 우즈벡 방문이 관광차 온 것이 아니였기에 꾸일루크 바자르와 김병화박물관까지 갈 수가 없었고 아쉬운대로 올로이 바자르라도 찾은 것이다.  

 

 

 

 

 


카자흐스탄은 소련 붕괴 후 농업 기반이 붕괴되어 현재 복구되는 과정에 있다. 소련 말기 100을 생산했다면, 현재 30정도 밖에 생산을 하고 있지 못하다. 그래도 세계 5위의 곡물 수출국이다. 좋은 지질과 밀생산에 좋은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식량 자급자족이 안 되는 국가이며, 가장 원유의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다. 그래서 한국에게는 자원에 나라, 곡물의 나라 카자흐스탄이 매우 중요하다
 

차의 뒷자리는 물론 앞자리의 조수석과 트렁크에까지 양배추를 가득 실고 나온 시장상인의 차.

 

 

 

우즈베키스탄에는 지금 체리가 제철을 맞아 시장에 엄청 많이 출하되고 있었다. 맛을 보니 상당히 맛있었고 가격도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싸다. 다만 이곳은 도매점이어서 소량으로 판매하지 않았고, 소량판매는 시간이 더 지나야 할 듯했다. 체리 이외에도 딸기가 시장 좌판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거래되고 있었고, 토마토와 기타 과일들도 많이 나와 있었다. 체리는 시장구경이 끝나갈 무렵 소매로 파는 곳이 있어 원없이 먹을만큼 많이 사서 먹었다.   

 

 

 

우즈베키스탄의 화폐단위는 슘(cym)인데 공식한율은 1달러당 1,450슘. 시장에서는 1,700슘에 환전되고 있으며 여행당시 대략 우리 원화와 1:1 정도로 생각하면 됐다. 화폐단위가 최근에서야 1,000슘이 나왔고 조금 비싼 물건을 사려면 돈을 한다발씩 주고 받아야 한다. 최근 1,000슘의 고액(?) 화폐가 나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1만슘이 없어 불편했다. 하지만 경제는 심리적 효과도 큰만큼 1만슘이 나오면 물가가 올라가고 인플레가 심해질 수 있는 우려가 있을 것이다. 

 

화폐단위가 커지고 동전이 거의 사용되지 않아 동전을 구할 수가 없었는데 티무르 박물관 관광차 갔을 때 입구의 조금만 항아리에 동전이 담겨져 있어 동전 몇개를 챙기고 챙긴 동전보다 훨씬 더 많은 지폐를 놓아두고 나왔다. 시장에서는 동전이 거의 통용되지 않은 실정이라고 한다.   

 

 

 

 

시장 한켠에는 이렇게 꽃을 파는 꽃집도 있었는데 꽤 다양한 종류의 꽃을 팔고 있었다. 이 꽃집은 손님들이 아침부터 몰리지 않는듯 내가 방문할 무렵 꽃들을 진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한다. 우리 고려인들도 30여만명이 있다고 하지만 100여 인종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인지라 마치 인종의 전시장에 와 있는듯한 느낌이다.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그런 인종의 홍수속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처세술이 아닐지 모른다. 특히 시장에서는 도저히 어느나라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을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견과류와 말린 과일을 판매하는 중국 혈통으로 보이는 우즈벡 주인과 함께. 이 집에서 말린 살구를 선물로 사서 가지고 왔다.  

 

 

 

 

 

우즈베키스탄의 지하철은 'M(etro)'자로 표시되어 있고 한국 지하철에 비해 어둡고 오래되었다. 사진에서처럼 모든 지하철 표시판에는 우리의 LG가 광고를 하고 있었다. 타슈켄트에는 있는 지하철은 총 3개의 노선으로 각 노선마다 약 10개 정도의 정류장이 있고 대중 교통비가 저렴해서 한번 탈때마다 우리 돈으로 300원 정도 들었다.  타쉬켄트에는 트램, 트롤러, 버스, 지하철이 공존하고 있어 대중교통 체제가 잘 되어 있었고 교통비는 다른 물가에 비해 특히 더 저렴했다. 

 

 

 

지하철 역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화려하게 장식된 천장과 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하철 역 하나하나가 하나의 예술이라고 보아도 충분할 정도로 각 지하철 역마다 특별한 테마를 가지고 천장, 벽, 조명 등이 잘 꾸며놓았다. 지하철과 역사내부 사진 찍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역사에 들어가니 50여m 간격으로 푸른제복의 경찰이 순찰을 돌고 있어 사진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직 사회주의 국가이고 직업이 많지않아서 군인이나 경찰공무원이 많은 나라이지만 쓸데없이 경찰이 많은 것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지하철 역사안에도 몇 십명의 경찰이 감시감독을 하고 있고, 차량에도 탑승해서 감독을 하고 있으며 사진을 찍으면 삭제할 것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 말로는 돈을 주면 허용해 준다고 하는데 미처 그 정보를 알지 못해 시도해 보질 못했다. 사진 몇 장을 찍다가 나중에 걸려서 경찰로부터 여권제시를 요구 받았는데 여권과 디카 모두를 모두 확인하고 나서는 사진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새 몇 장 더 찍었으나 차량사진 몇장을 삭제했더니 됐다고 해서 나머지 몇 장 건진 사진이다.  

  

 

 


우즈베키스탄은 1966년에 지진으로 인해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구 소련의 도움으로 타쉬켄트가 새로 건설되어졌고, 그 때 지하철도 완공되었다고 한다. 지하철이 건설되어진지 50여년이 되어가는데 열차와 오래되고 고풍스러워 보이지만 지하철 역사는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상당히 아름다워 보였다. 이미 다른 나라에도 지하철이 모두 있고 지하철이나 역사내부의 모습이 그다지 미밀사항이 아닐진되 아직까지도 비밀이 많은 사회주의 국가시절의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종점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더니 승객이 몇 명 남아 있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맞은편에 있는 젊은 학생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신도심에서 벗어나 외곽의 지하철역에 내렸더니 이곳에는 서민들이 살고 있는 집들이 많았다. 저층 아파트도 보이고 개인주택도 많이 있었으며, 조그만 상점들도 많이 있었다. 신도심의 호텔지역과는 달리 사람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역에서 내려서 보니 이틀전에 보았던  타슈켄트 TV타워를 지나쳐와 뒷편으로 타워가 보였다. 역시 타쉬켄트에서는 TV타워가 이 지역의 랜드마크인 셈이다.  

 

 

 

 

 

타슈켄트 TV타워를 배경으로... 가까와 보여도 걸어가면 한참을 가야할 것 같다. 산책을 하면서 돌아다니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우즈베키스탄 말은 우랄-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로 어순이 우리 말과 같다. 일본어처럼 언어를 배우기가 영어에 비해서 쉬운 편이다. 외국에 나가면 항상 외국어를 다시 한번 해 보어야지 하고 다짐을 하는데 귀국하면 또 쉽게 잊어버린다. 이곳 버스 정류장에도 아침 출근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시내버스는 대부분 벤즈버스인데 디젤엔진이라 매연이 많았다. 시내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 더 많았으면 이곳 글과 말을 몰라도 대충 눈치로 노선을 알아차려 버스를 한번 타 보았을텐데 시간이 부족해 시도해 보질 못하고 타고 갔던 지하철을 다시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타쉬켄트 시내 관광을 나섰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아미르 티무르 광장. 이미 첫날 달리기를 하면서 한번 와 보았지만 다른 일행은 와 보지 못했으니 관광의 시작점인 티무르 광장을 건너뛸 수가 없다. 티무르 광장은 아미르 티무르의 동상이 있는 곳으로 이 주변을 타쉬켄트의 중심가라고 부른다. 우즈베키스탄이 구소련에서 독립하기 전에는 이 광장에 티무르 동상 대신에 마르크스의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처럼 우즈베키스탄도 독립과 함께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14세기에 사마르칸드를 수도로 중앙아시아를 제패한 아므르 티무르는 전성기 시절에 인도의 델리에서 바그다드까지 점령하고 모스크바에 쳐들어가기도 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대통령인 카리모프는 이전 티무르 제국을 부활시키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공원 한가운데 있는 아미르 티무르 동상.

 

 

 


시내를 제외한 우즈벡을 여행할 때는 가로수와 유실수를 제외하고는 초지의 형태가 많았는데 타쉬켄트 시내에는 비교적 가로수가 많이 심어져 있었고 관리도 잘 되어 있었다. 그 배경에는 스프링클러 장치가 되어 있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그 장치를 통해 관리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오래전부터 시내 조경에 관심을 가지고 관리해 온 것이다. 비록 구 소련의 해체로 인해 지금은 국민소득이 1천달러 남짖이지만 그들의 삶의 질은 우리와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5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