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대만 ('09.7)

대만 여행 5-3 (타이페이 228공원, 화련), (2009.7)

남녘하늘 2010. 1. 1. 00:27

 

 지우펀(九份)과 예류(野柳) 관광을 마치고 다시 타이페이시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동안 소나기가 내렸는데 이번 여행을 다니는 동안 몇 차례 비가 왔지만 버스나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만 내려 관광을 하는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여행 복이 많았다고나 할까?  원래 패키지 여행은 여행 일정이 끝나기 전에 개인행동을 허용해 주지 않는데 호텔이 워낙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가이드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리 일행만 저녁시간에 시내관광을 하기로 했다. 모처럼 관광을 왔으면 이런 관광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호텔에 돌아가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데... 결론적으로 시내를 다니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타이페이 역으로 택시를 타고 와서 역을 기점으로 주변의 도심을 돌아 다녔다. 타이페이 역은 모든 철도가 지하에 건설되어 있어 지상에서는 철로를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었다. 철로로 인해 동서나 남북으로 동선이 끊어지는 것을 방지한 셈이다. 우리가 서 있는 발 아래로 철도가 지나가고 있다.

 

 

 

얼얼바허핑공위엔(二二八和平公園), 우리 말로 하면 228 평화공원. 1947년에 일어난 대만의 민중 봉기인 2.28사건을 기리기 위해 공원의 이름이 바꾸었다. 타이베이기차역 앞 관전로에 위치하며 원래 명칭은 타이베이공원, 또는 신공원으로  타이베이시에서 가장 역사 깊은 공원이다.  2.28사건은 당시 대만 전역으로 확대 되었고 이 사건과 관련되어 수만명의 대만인이 사망하였다 한다.

 

 

 

 228 평화공원에서 보이는 타이뻬이 역 근처의 신광백화점 건물. 101빌딩에 세워지기 전까지는 대만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였는데 이제는 두번째 건물이 되었다. 조명을 멋있게 해 놓아 멀리서도 아름답게 보인다. 옛날에는 신광백화점 건물에 전망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그 역할도 101빌딩에 넘겨 주었다.  

 

 

 

 

잠시 '2·28사건'과 관련된 대만 근 현대사를 이야기 하자면 우리나라의 5.18 광주민주화 운동과 상당히 많이 비교된다.


이 사건은 1947년 2월 27일 타이페이역 근처에서 전매품인 담배를 몰래 팔고 있던 여성을 본토 출신의 전매국 단속반원이 구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대만인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사상자가 나왔다. 사태는 일거에 확대돼 타이베이시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및 데모대의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었고, 3월 1일 이후 섬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당황한 국민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 8일 본토에서 2개 사단의 진압군을 대만으로 불러들여 3월 9일부터 대대적인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등 무고한 대만 원주민들이 무참히 죽었고 현지의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인 언론인들도 체포되거나 처형됐다. 당시에는 희생자의 숫자로 발표되지 않았고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이 사건은 대만 토박이들과 1945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난 뒤 대만으로 이주한 중국인, 1949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공산당에 패한 뒤 대만으로 피란한 중국인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 이후 국민당

장제스(石) 정부의 군사 독재는 1949년에서 1987년까지의 계엄령으로 이어졌으며, '백색공포'로 알려진 40년의 탄압정치로 이어졌다.

 

1987년 대만에서 계엄령이 해제되기 전에는 이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1988년 리덩후이(輝) 정권이 출범한 후 '2·28 사건'의 진상조사가 진행되었다. 4년간에 걸친 진상조사 끝에 나온 공식보고서에서는 당시 사망자가 본토 이주자 7백 ~8백명을 포함해 1만 8천~ 2만 8천명이라고 발표했다.

 

1995년에 2월 28일에는 사건발생 48년만에 리덩후이(輝)총통이 국가 수반으로는 처음으로 희생자 가족에 사죄의 뜻을 표시하는 한편 2월 28일을 `평화의 날'로 제정하고 사건 진상규명을 약속했다. 이날 대만 타이베이 공원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결국 1997년 대만정부는 사건 50주년을 맞아 과거정권의 잘못에 대해 정부의 공식사과를 발표하고 2.28 기념탑과 기념관을 건립했다고 한다.

 

공원안에 기념관을이 있으나 관람시간이 늦어 방문하지는 못하고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공원의 곳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228 평화공원의 기념탑을 배경으로...

 

 

 

타이페이의 총통부(總統府). 1919년 일본의 식민 통치 시절 일본이 그들의 필요로 대만총독부로서 만든 건물로 대만의 독립이후엔 대만 정부의 총통부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다. 1945년에 미국의 공습이 있어 크게 파괴되었는데 1949년에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총통부의 앞으로는 일자로 쭉 뻗은 상징적인 대로가 펼쳐져 있어, 지금은 철거되어 없지만 광화문 뒤에 있었던 중앙청으로 쓰였던 조선총독부 건물과 흡사한 느낌을 받는다.  

 

 

 

 

 

 

 

타이페이의 총통부(總統府) 쪽에서 타이페이 역으로 가는 시내 중심가에 많은 숫자의 서점이 자리잡고 있었다. 중심 상업지역에 그토록 많은 서점이 자리잡고 영업을 하고 있고, 그 서점이 망하지 않고 운영된다고 하는 점이 대만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서점에는 사람들이 많이 붐볐다. 우리나라에는 대학교 근처에도 변변한 서점 구경하기가 가뭄에 콩나듯한데...  대만의 저력은 이런 곳에서 나오지 않나하는 생각이 가득... 4-500m를 걸어가면서 대략 30개 이상의 서점을 마주쳤다.  

 

 

 

 

타이페이 중심가에 있는 건물은 보행자 통로가 특이하게 되어 있다. 2층 이상은 보행자 통로까지 건물을 짖고 1층 보행자 통로쪽은 비워놓아 사람들이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용적율을 최대한 쓸 수 있도록 해 놓은 것 같다. 아마도 좁은 국토를 최대한 사용하면서도 평소 비가 많이 오는 것을 고려해 보행자를 위한 정책이 아닌가 싶었다.  

 

 

 

시내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을 때이다. 대만의 택시 요금은 기본요금이 대만돈으로 70원, 우리 돈으로는 2천 8백원 정도. 추가 250m에 5원(200원)이 올라간다. 시내가 크지 않기 때문에 택시비도 많이 나오지 않는 편이다. 혼자서 이용했다면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4명이 이용하면 MRT나 버스에 비해 그다지 비싸다는 느낌도 없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대만사람들이 많이 친절한데 택시기사님도 역시 엄청 친절했고 시내에서 호텔까지 운행했는데 시외로 가는 추가요금도 요구하지 않고 장거리를 달려서인지 엄청 고마워했다.  

 

 

 

타이페이 기차역(台北火車站 ;타이베이후어처짠)에서 보이는 신광백화점 건물. 어제 밤의 화려한 조명은 보이지 않지만 역시 높은 건물이다.  화리엔(花蓮:화련)으로 떠나기 위해 타이페이 기차역에 도착해서 찍은 사진이다.  

 

 

 

타이페이 기차역(台北火車站 ;타이베이후어처짠)의 모습. 지상 6층 지하 2층의 큰 규모를 자랑한다. 전국 각지로 갈 수 있는 기차와 대만 전철인 MRT를 동시에 이용할 수 있고 주변에는 대형 백화점과 쇼핑몰이 몰려 있다. 타이페이 역을 빙 둘러 택시들이 줄 서 있고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  우리는 이곳에서 한국의 새마을호와 비슷한 자강호를 타고 화리엔(花蓮:화련)으로 떠난다.  

 

 

 

 

타이페이기차역(台北火車站 ;타이베이후어처짠)의 내부 모습. 건물 안에 건물을 지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건물 안에 들어 갔는데 다시 독립된 건물을 마주치는 느낌이다. 기차역의 내부임에서 우뚝 서 있는 건물앞에 서 있는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열차표를 판매하고 기차나 지하철의 일종인 MRT는 지하로 내려가서 타게 된다. 

 

 

   

 

 

 

개찰구를 지나 탑승구로 내려오니 마치 지하철 타는 것과 같다. 9시에 화리엔(花蓮:화련)행 급행열차가 들어와 2호차에 탔다. 타이페이에서 화리엔(花蓮:화련)까지 직선거리는 100km 정도인데 굽이굽이 도는 길이라 200km가 넘어 시간도 2시간 반이 걸렸다. 타이페이 역에서 다음역인 쏭산(松山:송산)역을 지날 때까지 한참을 지하철처럼 지하구간으로 달린다.  

 

 

  

 


기차 좌석이 홀수는 홀수끼리, 짝수는 짝수끼리 번호가 매겨져 있다. 내 좌석이 2호차의 8번 자리였는데 내 옆자리는10번이고, 통로 건너편이 9번, 11번 이런 식이다. 참으로 독특한 방식이다. 차량은 현대중공업에서 제작한 차량이었다. 거리에서 보이는 승용차는 90% 이상이 일본제였는데 열차라도 현대 것이니 뿌듯한 맘이.. 

 

 

 

 

화리엔(花蓮:화련)으로 이동하면서 보이는 풍경.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등 열대풍경과 더불어 차창밖으로 보이는 바닷가 집들의 모습에서는 일본풍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우리나라의 동해안을 가고있는 것으로 착각을 할 정도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파른 산과 계곡, 이곳이 3천m가 넘는 산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강호 기차로 두시간 삼십분정도를 달려 화리엔(花蓮:화련)역에서 3번째 전역인 신청(新城:신성)역(태로각역)도착했다. 타이페이에서 화련까지 직선거리는 100km 정도인데 굽이굽이 돌아가느라 시간도 많이 걸리고 거리도 제법 되는 것 같다. 열차 모양은 새마을호 같은데 역이란 역은 모두 서는 것으로 봐서 완행열차이다.  

 

 

 

태로각 협곡을 가기 전에 들른 곳이 대리석 공장이었는데, 대리석 공장은 생산과 판매를 할 수 있도록 대만 정부와 민간이 각각 반반씩 투자를 한 곳이라고 하였다. 이 화련에는 대리석과 옥이 많이 난다고 하며 돌 공장도 많다고 한다. 대리석을 판자처럼 잘라놓은 것을 보며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대리석과 옥을 깎아 만든 조각품을 구경하며 그 정교함에 놀랐다. 대리석 공장은 주말이라 일을 하지 않고 있어 구경할 수 없었고, 옥과 비취를 가공한 공예품을 전시한 전시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작은 소품을 몇 가지 샀다.

 

 

 

 

오른쪽 옥으로 만든 공예품이 먹기만 하고 싸지는 않는 픽숑(?)이라는 상상의 동물. 항문이 없어 들어온 재산을 내보내지 않는다고 하여 대만사람들이 재물운으로 여겨 가정마다 가지고 있다는데...   

 

 

  

 
이곳에는 대리석과 옥가공 공장과 더불어 관광객을 위한 대형식당과 원주민인 아미족들이 공연하는 극장까지 모두 갖추어 놓았다. 한마디로 관광객을 위해서 모든 시설을 한군데 모아 놓은 셈이다. 공예품 전시장도 마치 무슨 박물관처럼 지어 놓았다. 대리석이 많이 생산되는 곳임을 건물의 외관을 보고도 알 수 있다.  

 

 

 

 

 

남는 시간을 이용해 근처의 숲속도 걸어보고...

 

 

 

그늘 한점 없는 마당에서는 엄청 덥다. 뒤로 보이는 산에는 구름이 끼어 있다.

 

 

 

 아미족의 전통음악과 민속춤등을 관람할  수 있는 극장.  

 

 

 

 

 

아미족의 민속극장에서 아미족의 전통음악과 민속춤등을 보았다. 아미족은 여러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잘 생긴 민족이라고 한다. 그들의 화려한 의상과 춤을 통한 그들의 생활상을 단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 아미족은 모계사회이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선택한다고 한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그 남자집에 가서 15일간 살면서 남자부모로부터 허락을 받는다. 남자와 살다가 마음에 안들어 헤어질때면 여자가 남자의 짐을 집밖에 내놓으면 헤어지자는 표시라고... 

 

 

 

 

긴 나무로 네사람이 펼쳤다 오므리고 두사람이 껑충 껑충  뛰면서 건너는 공연등이 있었다. 쇼는 소박하다 못해 지루했고 유니폼처럼 맞춰입은 민속의상에 화장을 진하게 한 여성들은 전혀 원주민스럽지 않았다. 웅장한 자연과 놀랄만한 선조들의 이야기에 비해 아직은 좀 미흡한 관광 컨텐츠.  지루하고 시간이 아까왔다.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관광객과 함께 하는 시간이 있었다. 전통혼례를 각색한 프로그램인데 관광객과 함께 참여하고 뒷풀이로 어우려져 춤을 춘다. 그리고 그 모습을 프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둥근 대리석액자에 넣어 대만돈 400원(우리 돈 1만 6천원정도)에 판매한다. 아마 입장료도 없는 민속극장의 수입구조를 이 기념품 판매로 통해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신랑이 신부를 지게에 메고 산길을 걸어 집까지 간다는데 남자 손님 중에서 몇 명 지게를 메고 아가씨들을 지고 걷게 하며 흥을 돋우었다. 많은 손님중에서 내가 불려 나가 관람객 앞에서 쇼를 하고 지게에 아가씨를 지고 사진까지 찍었다. 내가 힘이 세어 보인 것인지 아니면 우리돈으로 일만육천원 정도하는 기념품을 사줄 사람으로 생각된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