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그리스, 터키('14.5)

터키 여행 26-25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 (2014.5)

남녘하늘 2016. 10. 11. 01:31

 

 이제 터키 여행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이번 터키 여행은 이스탄불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고, 머무는 동안에도 아시아쪽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유럽쪽의 신사기지는 거의 방문하지 못했다. 이스탄불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은 신도시로 옮겨졌지만 우리 일행이 구시가지에 집중했던 이유는 오스만 제국과 비잔틴 제국이 남긴 대부분의 유적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블루 모스크 방문을 마치고 맞은편에 있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The Aya Sofiya Museum) 을 방문하게 되었다.

 

  537년 성당으로 지어진 이 박물관은 916년 동안은 캐토릭 성당이었으며, 오스만 제국 시대에서 478년간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되어 오다가 1934년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1935년부터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1520년 스페인에 세비야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성당이었으며, 1626년에 완공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무려 천년이나 앞선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매표소를 지나 박물관에 입장하면 모스크에서 볼 수 있는 건축물이 눈에 뛴다. 예배 전에 손발을 씻었던 세정 시설인 팔각형 샤드르반(sardirvan)으로, 술탄 마흐메드 1세 때인 1740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오스만 건축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고, 이스탄불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샤드르반 중 하나이지만 지금은 이곳이 모스크가 아니라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고 관람만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박물관으로 바뀌기 전의 소피아 성당은 세 번에 걸쳐 건축되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인 537년에 지어진 세 번째 건물이다. 첫번째 성 소피아 성당은 360년에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건축되었으나, 시민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인한 화재로 404년에 소실되었다. 두번째 소피아 성당도 415년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 역시 532년 시민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파괴되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쪽에는 2차 소피아 성당 시절의 유적이 야외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내부로 들어서면 두 개의 회랑이 나온다. 성당은 서쪽에서 동쪽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본당으로 들어가려면 이 회랑을 거쳐 가야 한다. 회랑 한쪽 벽면에는 아야 소피아 성당과 관련한 자료와 다양한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고, 한켠에서는 영상자료를 상영하면서 개략적인 성당의 역사를 알려 주고 있었다. 회랑의 천장과 벽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고 이곳의 분위기는 다소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회랑을 거쳐 본당으로 들어가는 두 번째 출입문은 모두 9개가 있는데 양쪽 끝의 3개씩 6개의 문은 일반인이 드나드는 문이였고, 중앙의 큰 문은 황제만 드나들었던 황제의 문이다. 그리고 황제의 문 옆의 조금 낮은 2개의 문은 고위 관직자, 사제, 대신들이 사용하는 문이었다고 한다. 황제의 문 위쪽에는 이 박물관에서 많이 접할 수 있는 모자이크 벽화가 그려져 있다. 가운데 의자에 예수가 앉아 있고 양쪽 옆으로 둥근 원에는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옅은 분행색과 흙색의 비교적 단조로운 느낌을 주는 외관을 바라보다 입장한 아야 소피아 박물관의 내부는 엄청 화려했다. 내부는 오랜 세월의 역사를 말하듯 낡은 느낌과 색이 바랬지만 정말 웅장하다. 1층과 2층의 갤러리 곳곳에서 남아있는 모자이크화를 통해 한때 이곳이 성당이었음을 알 수 있었지만, 성당보다는 모스크의 느낌이 더 많이 드는 건축물이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어 기독교건 이슬람교건 종교적 행위는 일절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비록 박물관의 일부지역이 보수 공사중이어서 아야 소피아 박물관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는 없어 아쉽지만 남은 부분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한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넓은 공간에서도 눈에 바로 들어 오는 것은 초록색 바탕에 금색글씨가 쓰여진 직경 7.5m의 커다란 원판이다. 기둥에 고정시킨 8개의 원판에는 하트(Hat)라는 아랍식 서체로, 유일신 알라((Allah),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와, 이슬람의 종교적 최고 권위자인 칼리파(Khalifah)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중앙 홀의 바닥에는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으로 만든 동그란 무늬의 자리가 있다. 옴파로스(Omphalion)라고 부르는 것으로 옴파로스는 세상의 중심 또는 배꼽이라는 뜻으로 비잔틴이 로마를 대신하여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이 대관식이 이 공간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아름다운 형태의 색색의 대리석은 비잔틴 제국 모든 지역에서 가져 왔는데, 이 대리석 뿐만 아니라  아야 소피아 박물관의 자재는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레바논 바르베크의 아폴론 신전의 기둥 등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석재였다고 한다.  

 

 

 


 본당 입구 양쪽에는 비슷한 모양의 엄청나게 큰 대리석 항아리가 있는데, 이 항아리는 헬레니즘시대에 만들어진 유물로 16세기 경 술탄 무라드 3세(Murad III)가 페르가몬(Pergamon)에서 가져온 것으로 예배 시간에 음료를 나눠주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야 소피아의 중앙 홀은 거대한 돔을 받치는 단 한 개의 기둥도 없지만 가장 자리에 본당에 40개, 위층 갤러리에 67개 등 모두 107개의 기둥이  있다. 내부는 길이 81m, 너비 70m의 바실리카 형태로, 지름 약 33m의 거대한 돔을 절묘하게 조합시킨 건축물이다. 웅잠함과 섬세함의 절묘한 조화와 역사적인 내부의 시설 등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삭성당을 방문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슬람 세력은 남아 있는 비잔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건물 내부를 모두 회칠로 덮어버리고 그 위에 이슬람 문양을 도배해 버렸다. 그나마 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남겨 두었기 때문에 1,500년 넘는 시간을 견디오 온 두 문화의 흔적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의 승자가 다른 종교에 관용을 베풀면 역사적인 유물이 온전하게 보존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파괴되어 사라지고 만다. 치열한 전쟁은 치뤘지만 정복 당한 나라의 종교시설을 파괴하지 않고 같은 공간을 종교적으로 활용하는 실용을 보인 대표적인 곳이 아야 소피아였다.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출범할 때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은 아야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 정책을 펼쳤던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초대 대통령은 이 건물을 인류의 공동유산으로 지정하여 일체의 종교적 사용을 금지시키고 박물관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1층 중앙 홀 안 쪽 부분에는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에 이곳에 설치한 금색으로 장식된 미흐랍(Mihrab)이 있다. 미흐랍이란 이슬람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Mecca)의 방향을 표시해 주는 곳을 말하는데, 정중앙이 아니라 메카 방향으로 약간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설치되어 있다. 원래 성당의 제단이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 방향을 향하여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흐랍의 오른쪽에는 계단 형식의 설교대가 있다. 이를 민바르(minbar)라고 하는데 성직자가 이곳에 올라가서 설교를 했다고 한다.   

 

 

 

 

 박물관 1층 관람을 마치고 2층에 있는 갤러리로 올라갔다. 2층 갤러리는 본래 여성들이 예배를 보는 장소이자 종교회의 때 사용하던 곳이다.

그런데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 아니라 경사진 길로 빙빙 돌면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이는 당시 미사에 참석하는 황후와 귀부인들이 가마를 타고 올라가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한층의 높이가 엄첨 높아서 일반 건물 4~5층 정도 올라가는 느낌이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남쪽 갤러리부터 구경하여야 하는데 갤러리 중간에 천국의 문으로 불리는 대리석 문이 나온다. 이 문을 통과하기 전에 노란색 바탕에 기하학적인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된 천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에서는 사람이나 짐승을 형상화할 수 없으므로, 사원의 벽과 천정에는 풀과 나무와 기하학적 무늬를 이용하여 장식했다. 이곳 천정의 누런색 문양을 벗겨 내면 아마도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찬란한 그림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문을 지나면, 비잔틴 미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모자이크 벽화가 나타난다. 회랑 창쪽에 있는 벽화는 그 유명한 데이시스(Deisis)로, 라틴어로 간청이나 기원을 뜻한다. 예수를 중심으로 왼편에 마리아와 오른편에 요한이 그려져 있는데,13세기 후반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팔라이로고스(Palaeologue) 왕조 때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 벽화는 회칠을 벗기는 과정에서 일부 훼손되었다는데, 벽화 우측 하단에 조그맣게 원본을 추정한 그림이 걸려있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아도 멋있어 보이는데 이 역시 말로만 듣던 이슬람의 영향하에서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비잔틴 유산이어서 감동이 더해진다.   

 

 

 

 

데이시스 모자이크 벽화가 있는 곳에서 조금 더 지나 2층 갤러리 끝쪽에 가면 두 개의 모자이크화가 더 있다. 조에 여제 모자이크는 조에 여제와 남편인 콘스탄티누스 9세가 예수의 축북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해 놓은 작품이다. 조에 여제는 세 번 결혼했는데 처음 이 모자이크에는 그의 첫 남편인 로마누스 3세가 그려져 있었으나 결혼할 때마다 모자이크에서 남편의 얼굴과 머리 위에 쓰인 문구를 바꾸었다고 한다. 72세로 죽은 조에의 얼굴만이 젊은 시절 얼굴 모습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이 없으면 이런 내용은 알지 못한채 멋있다는 느낌만 가지고 돌아 왔을 것이다.      

 

 

 

 

 조에 여제 모자이크화의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비잔틴 황제 콤네노스 2세가 성당 건축기금을 상징하는 돈주머니를, 오른쪽에는 왕비 이레네가 봉납명세서를 들고 있는 모자이크화가 있다. 이 모자이크화는 1122년에 제작되었다는데, 콘스탄티노플에 남아있는 유일한 12세기 비잔틴의 그림이라고 한다. 왕비의 오른쪽 꺽인 벽에는 아들인 알렉시우스의 모습이 있다. 가운데 창문을 두고 두 모자이크 벽화가 나란히 그려져 있다.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구경하면서 1,500년 전의 건축기술이 오늘날의 건축술처럼 많이 발전했던 것이 아니어서 이처럼 커다란 사원을 만든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기술적으로도 방진 설계가 충분하지 않았을텐데 터키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지진에 의해서 무너진 신전과는 달리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중앙에 기둥도 없이 이렇게 넓은 공간을 가진 건물이 지진과 풍파를 견디며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게 기적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건축기술이 그 당시 더 뛰어 났는데 후대에 계승되지 못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2층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이 고풍스러워 보인다.     

 

 

 


 2층 왼쪽 회랑에 있는 갤러리 입구에는 기념품샵도 있었다. 또한 갤러리에는 아야 소피아 내부의 아름다운 공간과 모자이크를 확대한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아야 소피아 박물관만큼 이스탄불의 역사를 함축해서 보여주는 유적은 없는 것 같다. 아야 소피아는 박물관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보통의 박물관처럼 전시물이 많은 것은 아니었는데. 건물을 구성하고 있는 벽체, 기둥, 천정, 바닥 등 건물 자체가 빼어난 전시물이기 때문이다. 그냥 보아 넘길 수 있는 기둥 하나도에 역사가 있고 의미가 있었다.      

 

 

 

 

 

 남쪽 출구로 걸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모자이크 성화를 만난다. 이 모자이크화는 문 위의 바깥쪽에 있어서 뒤로 돌아보지 않으면 그냥 나오게 되는데, 지금은 출구로 사용하지만 원래 이곳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예배를 볼 때 경호원이 대기하던 장소였다고 한다. 두 명의 황제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 담긴 모자이크화다. 회덧칠에 감추어져 있었던 성화들은 1931년 미국인 학자에 의해 두 문화의 절묘한 동거가 확인되었고, 이후 이 박물관은 성지 순례하듯 기독교인들이 몰려들어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중앙돔을 보조돔들이 둘러싸고 있는 이 거대한 건물은 이후 오스만 제국의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며, 건물 외부에 보이는 네 개의 미나렛(minaret)은, 각각 다른 술탄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모양이 다르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박물관은 두 종교와 문화가 지혜롭게 만나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종교의 충돌인데 모든 종교가 사랑과 배려를 이야기하면서도 오늘날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것을 보면 아직도 공존에 대한 지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6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