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말레이시아 ('16.6)

말레이시아여행 20-15 (쿠알라룸푸르 - 국립박물관), (2016.6)

남녘하늘 2018. 1. 24. 01:07


 국립박물관은 말레이시아 전통양식의 지붕을 본따 만들었다. 벽면에는 말레이시아의 기원과 전설이 현대미술로 그려져 있다. 2010년 처음으로 말레이시아에 왔을 때에도 박물관 구경을 왔는데 본관 구경을 하지 못하고 별관만 보고 갔던 경험이 있는 곳이다. 두번째 말레이시아 방문 때에는 일행이 너무 많아서 생략하고 보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집사람과 함께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먼저 왔을 때에는 박물관 방문이 상당히 불편했었는데 오늘은 GOKL City Bus 레드라인을 타고 바로 박물관 앞에서 내렸다. 덕분에 더운 날에 걷지 않고 바로 박물관으로 입장이 가능했다. 처음 왔을 때에는 대중교통이 부족한 상태에서 엄청 더운데 횡단보도도 보이지 않는 이곳을 찾아 오느라 엄청 고생을 했었다. 박물관 입구에는 박물관 보수작업을 하는지 박물관 전경이 그려진 가림막이 쳐 있다.





 말레이시아의 역사를 간단히 살려보면  7세기에 슈리위자야 왕국에 속했다가, 13세기 이후에는 마자파히트 왕국의 세력 하에 들어간다. 1511년 포르투갈, 그 후 네덜란드가 이 나라에 진출했고, 1819년 조호르의 술탄과의 협정으로 영국이 싱가포르 식민지 경영에 들어가면서, 그 후 영국령 말레이가 출범하였다. 오랫동안 식민의 역사를 간직한 말레이시아는 1957년에 이르러서야 말레이반도 남부지역이 영국연방의 말라야 연방으로 독립했고, 1963년 싱가포르·사바·사라와크를 합쳐 말레이시아 연방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1965년에 싱가포르는 여기서 이탈해 독립하였다. 이 때문에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관계가 매끄럽지도 못하고,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보다는 우리나라를 경제발전의 모델로 삼고 있으며 우리 나라 사람들을 좋게 생각하고 있다. 요즘은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사람이 대접을 잘 받는다. 

 

 1969년에는 말레이계와 중국계간의 인종폭동으로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기도 했었고, 말레이시아 연방 결성 직후엔 친 서방·반공민족주의를 외교의 기조로 삼았으나, 1970년 이후 라자크 내각은 비동맹·온건중립노선을 채택하였다.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는 동남아시아국가 연합의 선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친 서방 외교를 기본으로 하여 왔으며, 1981년, 1986년, 1990년의 선거에서 13개 정당의 연합세력인 '국민전선'이 압승하여 다민족국가의 이 나라가 정치는 말레이인이, 경제는 화교가 지배한다는 전통적 통치구조를 확립시켜 오고 있다.   







 말레이시아 국립박물관은 1963년에 문을 열었다. 2층 건물에 총 4개 전시실이 들어서 있다. 전시실은 시대순으로 둘러보면 되는데 첫 번째 전시실(갤러리 A)은 선사시대, 두 번째 전시실(갤러리 B)은 말레이 왕국 시대, 세 번째 전시실(갤러리 C)은 식민지 시대, 네 번째 전시실(갤러리 D)은 오늘날의 말레이시아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외관으로 보았을 때는 꽤 많은 전시장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박물관 규모가 작아서 놀랐다. 





 선사시대 유물이 있는 A 전시실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세계 어디를 가나 국립박물관은 석기시대 돌 파편 유물과 깨진 항아리는 꼭 등장하는데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다. 과차(Gua Cha) 지역에서 발굴된 5천년 전 어린아이의 뼈도 보인다. 과차 유적에서는 유골 이외에도 석기, 토기, 장신구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약 오십만년 전 유골로 추정되는 자바 원인(Java Man)의 유골도 보인다. 박물관 내부가 시원할줄 알았는데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는지 높은 천장임에도 덥다. 그 때문인지 박물관에 관람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동남아시아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던 말레이시아였기에 아랍이나 중국에서 건너온 고대 유물도 많이 보인다.  








 께다(Kedah) 주의 술탄이 기거하던 세툴 왕궁(Setul Palace)의 벽과 문을 제 2전시실 입구에 가져다 놓았다. 꽃과 잎 문양으로 장식된 벽과 문인데, 말레이 양식과 자바 양식이 혼용돼 있다. 나름 출입문에 따로 발판을 만들어 두기는 했지만  중요한 문화재인데 한쪽으로 전시하지 않고 전시실 입구에 세워 놓은 것이 잘한는 것인지 모르겠다. 






 BC 300년경에서 AD 300년경에 이르는 시기에는 바다 건너 인도는 힌두교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시기의 인도인들은 발전된 항해기술로 전 아시아를 돌아다녔는데, 군소 부족국가가 난립하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도 들어와서 힌두교를 전파하였다. 이 시기의 인도인들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가야의 수로왕의 부인인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후가 한반도 왔던 것도 이 때다.내 성인 김해 허가의 시조가 허황후와 김수로와이다. 말레이시아도 인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와 천년이상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 유물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14세기에 말라카 왕국이 세워진 이후, 말라카는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발돋움 했다. 말라카의 주요 수출품은 향신료였다. 향신료는 음식의 맛을 풍부하게 해 주는 것 뿐만 아니라 식품을 장기 보존하는 데도 필요했다. 말라카의 향신료는 무역상들에 의해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다. 향신료 뿐만 아니라 정글에서 나는 재료들도 주요 거래 품목이었다. 예전에 무역에 사용되었던 배의 모형을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그림자 인형과 왕실에서 사용하던 식기. 그림자 인형극은 동남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즐기던 놀이이다. 말레이시아와 뿌리가 비슷한 인도네시아에서는 와양이라고 부르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해 놓았는데 이곳에서 그림자 인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는 데위 시타(Dewi Sita) 공주, 마왕 마하라자 라와나(Maharaja Rawana), 원숭이왕 하누만(Hanuman), 스리 라마(Seri Rama)왕자다. 힌두교의 대 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힌두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페라나칸(Peranakan)은 말레이반도로 이주해 온 중국인이 현지인과 결혼해서 낳은 아이를 뜻한다. 페라나칸은 말레이어로 현지에서 태어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페라나칸은 주로 말라카, 페낭, 싱가포르에 몰려 살면서 중국 문화와 현지 문화가 섞인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페라나칸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도자기와 의복도 전시되어 있다.   






 동양과 서양을 배로 오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 그래서 여러 문화와 문명이 전파되기도 했지만, 힘 있는 열강들이 가만히 놓아 두지 않는 곳이 바로 말레이시아다. 해상무역으로 번성하던 말라카 왕국에 맨 처음 쳐들어 온 것은 포르투갈이다. 말라카 왕국을 점령하고 이후 130년 동안 지배하였다. 포르투갈은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중국과 유럽을 오가는 무역의 주요 거점으로 말라카를 이용하였다. 1641년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전쟁이 벌어졌다. 바로 중국을 통한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싸움이었다. 그 결과 일개 해적국가에 불과했던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세계 해상강국으로 떠올랐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에 이어 말라카를 통치하였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말레이시아 통치는 교역의 통로를 확보하려는 목적이 컸다. 현지인들이 노역에 동원되었지만 노예로 팔려간다든가 식민지 산업수탈과 같은 착취에는 동원되지 않았다.     




 영국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 이어 말레이시아를 점령한다. 산업혁명으로 많은 양의 원자재가 필요했던 영국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말레이시아를 착취수탈하였다. 산과 들에는 대규모 식민지 플랜트 고무농장을 짓고, 강에는 거대한 공장선을 띄워서 각종 광물질을 재취하였다. 원래 말레이시아에는 고무나무가 없었는데 브라질 마나우스에서 고무나무를 들여 왔다고 한다. 말레이시아는 100년에 걸친 영국의 통치를 받으며 근대를 맞게 된다. 근대와 함께 찾아온 세계대전으로 다시 일본의 침탈을 받고, 일본이 패망하고 나서는 다시 영국의 통치를 받다가 1955년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완전한 독립이 조금 늦은 편이다.    





 현재 말레이시아는 연방국가로 입헌군주국이다. 국왕은 13개주 중에서 술탄이 있는 9개주에서 선출하며 임기는 5년이다. 선출된 국왕은 쿠알라룸푸르의 왕궁에 거주하게 된다. 국왕은 최고 통치자이자 술탄이 없는 4개 주의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임기동안 활동에 상당한 제약이 따르고 실직적인 정치는 하지 않는다. 실질적인 행정권은 역시 의회를 책임지고 있는 총리에게 있다. 아직 말레이시아의 각 주에는 저마다 국기가 따로 있고, 독립적인 요소가 많이 있고, 인종과 문화도 다른 부분이 있어서 하나의 말레이시아를 중요시하고 있다. 1957년 8월 31일, 말레이시아 연방의 초대 총리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은 메르데카 스타디움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박물관에서는 독립 선포 당시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국립박물관이어서 볼거리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찾아 왔는데 기대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했던 국립박물관이었다. 다만 박물관 관람을 통해 이슬람, 흰두, 중국 문화가 다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시간 서로 화합하고 융화된 문화속에서 공존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말레이시아를 볼 수 있었다. 열대지방에 있고 너무 오랫시간 열강의 식민시대를 거쳤기 때문에 박물관에 전시할 내용이 빈약했을지도 모르겠다.  





 국립박물관(Muzium Negara) 입구 야외전시장에는 주석운반에 쓰였다는 증기 기관차와 마차, 그리고 미니버스 복제품 등 말레이시아 차량 변천사를 알수 있는 각종 차량을 전시해 놓았는데 그다지 관심을 끌만한 수준은 아니여서 간단히 구경하고 이동했다. 이곳 국립박물관 을 오기 전에 방문했던 이슬람 예술 박물관이 훨씬 더 볼거리도 관리도 잘 되고 있었다. 괜히 이슬람 예술 박물관 입장료가 국립박물관 입장료보다 두배 이상 비싼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박물관에서 나와 다음 행선지인 쿠알라룸푸르 타워로 이동한다. 또 다시 GOKL City Bus를 이용했다. 이번 쿠알라룸푸르 여행에서는 지하철과 더불어 City Bus를 적절하게 이용함으로써 시간과 비용을 많이 절약했다. 버스 내부가 너무 시원하고 쾌적해서 내리기 싫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City Bus 노선도에도 KL타워가 그려져 있는데, 조금 가다 보니 KL타워를 지나치게 된다. 버스 기사의 설명이 필요없이 내리면 된다.  







(16편에서 계속)